[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2) 그 남자와 함께한 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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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 (2) 그 남자와 함께한 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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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에 있는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마치고 함께 광주공항으로 출발했다. 도착할 즈음 병원에서 보낸 안내 문자가 떴다. 대장에서 용종을 떼어낸 환자는 상처가 터질 수 있으니, 비행기를 타선 안 된다는 거였다. 아뿔싸! 그 남자는 용종을 8개나 떼어냈다던데…. 곧바로 길을 돌렸다. 목포항으로 달려가 가까스로 크루즈 퀸메리호에 올랐다.

배 안에는 카페와 빵집, 음식점이 있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구수한 냄새도 풍겼다. 용종 덕에 크루즈를 탔으니, 예상 못한 선물이었다. 흔들림 없이 미끄러지는 부드러운 느낌과 이동이 자유로운 것에 맘이 끌렸다. 천사대교 아래 신안 앞 바다를 봉긋봉긋 수놓은 섬들, 들꽃처럼 피어있는 섬 사이로 바다는 움씰움씰 출렁거렸다. 나비 되어 이 섬 저 섬 팔랑거리다 보니 난 어느새, 그 남자와 첫 여행을 떠나던 그때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꿈결 같았다. 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어 시시각각 오묘한 색의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클림트의 그림인 듯 몽환적인 황금빛은 뭔가,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은 야릇한 긴장감을 주기도 했다. 달큼한 설렘 속에 야자수가 늘어선 제주에 내렸다.

가이드를 겸하는 택시를 전세 냈다. 둘만의 오붓함이 좋았다. 기분 좋은 목소리를 가진 젊은 기사는 친절하고 반듯했다. 입담이 좋아서 조리 있게 설명해 준 덕에 명소마다 얽힌 이야기들이 귀에 쏙쏙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한정된 제주 땅이 외지인에게 팔려나가는 것과 수려한 자연풍광이 개발로 인해 훼손되고 있음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무엇보다 사라지고 있는 제주의 언어를 지켜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삶터를 사랑하는 열정에 깊이 공감했다. 그로 인해 관광지로만 여기던 제주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 당시 필수코스라 하면, 여미지식물원을 빼놓을 수 없었다. 드넓은 식물원은 실내외를 막론하고 다양한 꽃과 나무들로 가득한 신세계였다. 세계 각처의 진기한 식물과 유럽풍 건물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건만, 뭣 때문에 정장을 빼입고 하이힐을 신었든지 몰랐다. 뒤꿈치엔 물집이 잡히고 발가락은 짓눌려 아우성을 쳤다. 원수 같은 구두를 벗어 던질 궁리만 하며 뒤뚝뒤뚝 걸었다.

다음 날 아침, 햇살에 빛나는 싱그러운 산굼부리를 찾았다. 하얀 꽃을 피워올리던 낭창한 억새들은 ‘덩싹덩싹’ 몸을 흔들며 짓궂은 산바람의 희롱을 받아주고 있었다. 산굼부리는 특별한 곳이었다. 다른 오름이 용암이나 화산재를 뿜어내며 폭발한 데 비해, 어마어마한 가스와 열기로 산정의 바윗덩이만 날려 보내 생겼다는 것. 국내에는 오직 하나, 세계적으로 봐도 유래를 찾기 어려운 미르(maar)형 분화구라니, 자연이 만들어 낸 걸작이었다. 분화구를 배경으로 선 그 남자와 나는 줄무늬 커플티를 입었고, 젊다 못해 앳된 얼굴은 ‘아올아올’ 꽃처럼 벙글어 있었다.

아스라이 먼 시공을 날던 나비가 선상에 날개를 접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사는 사이 세월은 흘렀으니, 그 남자를 처음 만난 지도 사십 년이 지나고 있었다. 저만치 제주항의 불빛이 바다에 몸을 담근 채 일렁거렸다.

제주도립현대미술관. (사진=배공순)
제주도립현대미술관. (사진=배공순)

이번에는 문화탐방이었다. 저지리 문화예술 마을에 있는 도립 현대미술관에 먼저 들렀다. 김흥수 화백이 대표작을 기증한 곳, 드넓은 야외 전시장과 다양한 전시실을 갖추고 이 마을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근처 김창열 미술관의 독특한 외양 또한 작품이었고, 다양한 물방울 그림은 봐도 봐도 감탄이 나왔다. 뉴욕에 살던 작가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김환기 화백, 미디어아트의 거장 백남준과도 교유했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현재를 사는 예술인의 마을을 천천히 거닐었다. 고졸미가 흐르는 골목들, 고즈넉한 마을의 아취에 오랫동안 취했다.

왈종미술관에 들어섰다. 찻잔 모양의 미술관은 정겹고 신선했다. 그 남자는 제주의 풍요와 자연을 표현한 이왈종 화백의 동화 같은 그림 앞에 오래 머물렀다. 젊은 날의 실패와 아픔을 달래는 치유의 시간이 아닐까.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그 남자를 이끌어 옥상으로 올라갔다. 예쁜 집과 짙푸른 나무들 넘어 서귀포 바다는 유난히 잔잔했다.

그 푸른색에 이끌려 비양도로 건너갔다. 표현하기 힘든 바다 색깔은 그 남자와 나를 정화해 주는 거름막 같았다. 손을 잡고 흔들며 비양도 둘레를 걸었다. 아기 업은 형상의 호니토(Hornito)가 서 있는 해변은 선인장이 군락을 이루며 검은 화산석과 묘한 조화를 만들어냈다. 민물과 바닷물이 번갈아 담기는 펄랑못도 신비로웠다. 수천수만 년 이어지는 화산의 숨결을 더듬는 것인가. 그 남자는 내 어깨에 천연덕스레 기대어 화산석을 향해 앉아 있었다.

비양도. (사진=배공순)
비양도. (사진=배공순)

비양도의 아름다움 속에도 삶은 고여 있었다. 길 위에서는 여기저기 미역을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따가운 햇볕 아래 등 굽은 ‘할망’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막 따온 미역을 도로에 널거나 뒤집었다. 마른미역은 한군데로 모아 힘겹게 거두고 있었다. 허리를 펼 때마다 “휴~우, 휴~우”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모자를 쓰고 양산까지 펼쳐 든 내가 민망해 슬그머니 접었지만, 얄팍한 연민이 그 진지한 삶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비양도를 떠나는 배를 탈 때까지 말이 없는 나를 그 남자는 가만히 보듬었다. 엄마를 생각하려니 짐작했나 보았다.

제주 여행이 끝나갈 무렵, 산굼부리로 달려갔다. 그 남자와 나의 흔적이 바랜 채로 남았으려니…. 은빛이랄까, 황금빛이랄까. 억새꽃 바다가 황홀한 몸짓으로 굼실굼실 물결치고 있었다. 서걱거리는 억새의 노래를 들으며 분화구 올레길을 걸어 둥그런 언덕에 올라섰다. 넉넉한 산굼부리는 안온하고 평화로운 안식을 아낌없이 부어주었다. 한눈에 보이는 제주와 신비로운 산굼부리, 모든 것이 억새와 조응하며 소담스러운 가을 동화를 쓰고 있었다.

모슬포 바람 같은 세파에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한라산처럼 든든히 선 그 남자와 함께한 제주…. 설레던 신혼여행, 쉼이 고플 때면 훌쩍 떠났던 나들이, 더없이 편안했던 40주년 여행, 그때마다 행복이라는 보따리를 한 아름씩 안겨주던 제주였으니. 새움이 돋고 꽃이 벙그는 이 봄, 나의 그 남자, 남편과 함께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진 제주로 날아가고 싶다. <수필가 배공순>

수필가 배공순
수필가 배공순

배공순의 두근두근 제주 엿보기는...

나만의 소박한 정원을 가꾸고 싶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깊은 사유로 주변을 바라보고,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보태려 했던 것은, 문화재와 어우러지는 봉사활동이었다. 창경궁을 둥지 삼아 ‘우리 궁궐 지킴이’로 간간이 활동 중이다.

이곳저곳을 둘레둘레, 자박자박 쏘다닌다. 제주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레를 걷고 오름에 오르기를 좋아한다. 사색의 오솔길을 오가며 사람 내 나는 이야기, 문화재나 자연 풍광, 처처 다른 그 매력을 소소하게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약력>

2016년《수필과비평》등단, 한국수필문학진흥회원, 제주《수필오디세이》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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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2024-03-24 15:36:51 | 221.***.***.74
유채꽃이 그리워지네요.
깔끔한 표현이 편안합니다.
가까운 시간에 제주를 구경하고 싶어요.

맛있다 2024-03-23 17:09:10 | 118.***.***.127
글을 판 맛갈나게 쓰시네요 잘읽고갑니다

유채 2024-03-22 19:53:37 | 220.***.***.83
제주여행 안내서 잘 보고 갑니다 바빠서 한동안 제주에 못갔었는데 제주여행 가고싶어지는 지름글이네요

봉글 2024-03-22 19:09:50 | 223.***.***.116
참말로 수필가님처럼 글도 곱습니다~

설수아 2024-03-22 13:50:48 | 223.***.***.119
매월 연재되는 배작가의 기행문을 읽으며 제주 여행이
기다려지네요.
남편과 동행하여 작가님의 여행지 탐방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