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4) 2개의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존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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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철의 제주4·3과 삐라] (4) 2개의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존재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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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회에 걸쳐 8·15 해방이후부터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이전까지 제주사회에서는 어떤 정치사회단체들이 태어나 어떤 활동하다가 어떻게 사라져갔는지 간략히 살펴보겠다. 이것은 제주사회에서 출현했던 좌우익의 흥망사이면서,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이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이 속에는 제주4.3사건 발발이전에 뿌려진 삐라의 생산 주체들에 관한 이야기와 제주4·3사건의 발생원인과 배경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여기에 연재되는 글들은 지난 5월 12일 ‘제주언론학회’·‘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제주4·3희생자 유족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고영철이 발표한 내용(제주4·3당시 삐라에 관한 연구)가운데, 원고분량 관계로 세미나 자료집에 다 싣지 못했던 내용들 중의 일부임을 밝혀둔다. 이 연재는 자료집에 없는 내용을 중심으로 수회에 걸쳐 게재된다. 미력하나마 제주4·3사건의 전사(前史)를 이해하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필자 주>

◆ 도 건국준비위원회 9월 23일 결성

츠카사키 마사유키는 2007년『한국민족운동사연구』에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정세-일본군 전보문을 통해서’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후부터 미군이 진주하기까지의 약 3개월간의 일본군의 움직임과 제주도의 정세를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에는 1945년 9월 11일부터 10월 20일(전후)까지 제58군 사령부가 조선군 사령부(주: 제17방면군사령부)에 보낸 제주도 치안상항에 관한 전보문<終戦後における朝鮮軍電報綴> 등이 실려 있다. 이 전보문은 연구자가 밝히고 있듯이 새로 발굴된 미사용 자료라고 생각된다. 본 연구주제와 관련된 부분만을 따로 떼어내어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9월)11일 “11일 도내 치안 상황 이상 없음”

같은 날 미군기 1대가 제주 서비행장 상공에 침입하여 초저공비행으로 선회하면서 정찰한 것도 기록되어 있다.

12일 “12일 제주도 치안 상황 변화 없음”

14일 “14일 제주도 치안 상황 변화 없음”

15일 “15일 제주도 치안 상황 변화 없음”

17일 “17일 제주도 치안 상황 변화 없음”

△18일 “13일 제주도 주재관이 도내유력자에 대해 표면 활동 및 자위대결성 금지 조건으로 민중운동을 허용한 것을 계기로 전도를 걸고 민중조직화가 활발히 진척되고 있다.”

△ 20일 “20일 도내치안상황 현저한 변화 없음”

이 날도 B29가 1대, 약 40분간 제주 서비행장을 정찰한 것이 기록되어있다.

△ 21일 “15일 제주민중대회에 바로 응하여 도내 각지에 ‘건국위원회 준비위원회’의 명칭 하에 민중조직 공작이 활발히 진전되고 있다. 현재 군 및 내지인과의 마찰을 회피하고 있지만, 조선인 관리에 대한 폭행이 계속 산발하고 있다.

△ 21일 “21일 제주도 치안 상황 변화 없음”

△ 22일 “미군의 진주가 가까워지자 특히 20일 21일 서비행장 정찰보도에 의해 민중의 대군 협력은 한층 더 불성실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적극적인 반군행동이 산발하고 있다 독립운동에 관해서는 보안대의 결성, 깃발 행렬 등을 준비하고 있지만 군은 현재 금지하고 있다.”

△ 23일 “23일 도내 치안상황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결성대회는 금일 각면 대표 약 50명 제주읍에 모여서 정숙하게 실시하고 규약 결정, 임원선임을 끝내고 결성을 종료했다. 이 대회는 현재 군관에게 협조적이며 불온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 24일 “1. 참모장 일행 12: 20 착륙 …

3. 비행기에서 동행한 미군장교(테우대령)는 병기 집적소 비행장 항만을 시찰한 후 15:30 이륙, 귀환했다. …”

△ 25일 (…)

같은 날 “미군의 제주도 진주는 9월 28일 9시경으로 예정되어 있다. 미군대표는 ‘그린’대령이다. …”

같은 날 “25일 도내 치안 상황

1. 미군진주를 목전에 두고 민중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2. 건국준비위원회 내부에 분파항쟁이 생기고 있다.

3. 군은 주재사무관을 통해 민중운동은 정치운동의 선을 넘지 않도록 할 것을 철저히 지시했다.

△ 26일 “26일 제주도 치안 상황 변화 없음”

△ 27일 “27일 제주도 치안 상황 변화 없으며 미군진주를 목전에 두고 환영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 28일 “9월 28일 12시 무사조인 및 모든 절충사항을 종료했다”

같은 날 “1. 미군과의 교섭 결과는 이미 귀 부대로부터 통첩 받았던 여러 제한 외에는 군대의 배치숙영, 급식 등에 이르기까지 특별한 제한을 받지 않는 현황 그대로이다.”

2. 진주 병력은 현재 제주에 약 100명 내외일 뿐이다.

29일 “29일 도내 치안 상황 변화 없음.”

△ 30일

1. 30일 일본사람을 업신여기는 제주도민의 언동이 증가.

2. 금일 법무국장 제윗달? 소령 도청 방문, 주재사무관 이하 후니프? 관리 및 도민 유력자를 모아 행정사법일반에 대해 호우쥬진?(아놀드 소장 포고의 나무휀(ナムフエン)을 명시하고 또 조선인 변호사 3명을 각각 판사, 검사로 임명했다.

3. 이에 따라 특이사항이 없는 한 매일 치안 상황 전보를 발표하지 않으므로 양해바람. (※실제로 전보문에는 ?가 있는데 전보의 수신 상태가 나빴던 것 같으며 번역이 잘 안 된 것으로 생각된다)

△ 10월 9일

제주도 치안상황, 수일 이래 과격한 청년 분자의 대군경모(對軍輕侮)사건이 빈발하고 있다. 사례는 아래와 같다.

1. 육군창고 조선계 고용인을 협박하고 퇴직을 강요했다.

2. 9일 군소유 신문인쇄공장을 무단점거하려 했으나, 군의 압력으로 중지했다.

3. 4일 청년 30명이 조선계 운전수가 시운전 중인 군승용차를 폭력으로 점령하고 마음껏 이를 사용했다(후에 군에게 사죄했다).

4. 제주 구내에 한라단(漢拏団)이라는 청년폭력단이 친일 혹은 군에 협력하는 요인들을 점차적으로 협박하고 있다. (…)

이 전보문들은 제주도의 치안상황, 자위대(보안대 등)의 결성여부, 민중운동의 성격, 도건준의 결성과정 및 활동상황 등을 간략하면서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는 <표1>에 제시한 문헌의 기록들과 어긋나는 부분도 많아 보인다. 우선 ‘도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과정 등을 추적해 보자.

<표 1>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결성일 등 비교
<표 1>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결성일 등 비교

9월 13일 제주도 주재관(島司)이 도내유력자에게 표면 활동 및 자위대(보안대 등) 결성을 금지하는 조건으로 통제를 조금 완화하고 민중운동을 허용하자, 이를 계기로 전도에 걸쳐 민중조직화 운동이 점차 활발해 진 것으로 보인다.

민중운동을 허용하자 15일에는 ‘제주민중대회’가 개최되고, 그 후 전도 각지에서 ‘건국위원회 준비위원회’의 명칭 하에 건국준비위원회 조직 공작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다.

앞뒤 문맥으로 보아 9월 15일 개최된 ‘제주민중대회’는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위한 준비위원회의 모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 일주일간의 사전 준비를 마친 ‘건국위원회 준비위원회’는 9월 23일 각 면 대표 약 50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읍에서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따라서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가 9월 10일 결성되었다는 통설(通說)은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도건준 결성대회에 각 면 대표 약 100명 이상이 참석했다는 기존 문헌의 주장도 와 전되거나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결성대회는 제58군의 감시 하에 행해졌으며 전보문에 군은 “ 이 대회는 현재 군관에게 협조적이며 불온한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 전보문은 제주도에서 일본이 패전 후부터 미군의 군정중대가 도착하기까지 일명 ‘권력의 공백기’에 건준과 인민위원회에서 주로 치안활동을 담당했다는 기존 문헌의 주장들과 달리, 미군이 진주하기 이전까지는 제58군이 제주도 치안을 계속 통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제58군은 또한 주재사무관을 통해 민중운동은 정치운동의 선을 넘지 않도록 금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전보문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일본군과 일본인을 대하는 현지 주민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세세히 보고하고 있다.

이를테면 9월 21일자는, 현재 군 및 내지인(주: 일본인)과의 마찰을 회피하고 있지만, 조선인 관리에 대한 폭행이 계속 산발하고 있다. △ 미군의 진주가 가까워지자 특히 20일 21일 서비행장 정찰보도에 의해 민중의 대군 협력은 한층 더 불성실해지고 있다. 일부에서는 적극적인 반군행동이 산발하고 있다(9월 22일). △ 미군진주를 목전에 두고 민중운동이 활발해지고(9월 25일), 일본사람을 업신여기는 제주도민의 언동이 증가하고(9월 30일), 수일 이래 과격한 청년 분자의 대군경모(對軍輕侮)사건이 빈발하고 있다(10월 9일).

전보문에서 보듯이 주민들이 처음에는 군(軍)과 일본인과의 마찰을 회피하는 대신 조선인 관공리를 대상으로 분풀이를 하다가, 미군의 진주가 가까워지자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풀기위해 일본사람과 군과의 마찰도 마다하지 않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 2개의 건준이 존재했는가?

다음은 건준의 분열과 관련된 것이다.

앞에 제시한 <표1>을 보면 제주도에는 2개의 건준이 결성되어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➄⑥⑦⑨⑪⑭⑮). 그런데 2개의 건준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나 이유를 기술한 책자는 기존의 문헌가운데 조남수의『4·3의 진상』이 유일하다. 이외에 새로 발굴된 자료로는 제58군의 전보문을 들 수 있다.

제58군의 전보문부터 먼저 살펴보자.

9월 25일 전보문은 “미군 진주를 목전에 두고 민중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건국준비위원회 내부에 분파(分派)항쟁이 생기고 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 후에 관련된 보고내용이 없어 그 결과를 알 수 없으나, 이 전보문의 내용처럼 9월 23일 결성된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가 내부 분파항쟁으로 인해 두 개로 쪼개어졌다고 한다면, 그 사건은 아마도 10월중에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註: 9월 30일까지는 도건준이 건재하였음).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하는 종래의 주장으로 조남수의 것을 들 수 있다.

조남수는『4·3의 진상』(1988)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미군정이 발족하면서 군정산하에 모든 행정, 사법기관을 만들고 이를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협조기관인 정당 사회단체가 필요한 실정이었는데 건국준비위원회뿐이었다. 건준위원장은 좌익성향이 농후한 오대진이었다.

그때가지만 해도 좌우익 구별없이 서로가 자발적으로 제주도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고 건국운동에만 열중하던 오대진이 미군정과 상대하는 일에는 협력체제가 아니라 도리어 반항적이기 때문에 미군정에서는 자연적으로 우익인사들과 협조체제를 구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10월 9일에는 안세훈, 오대진을 중심한 좌익계 열성분자들이 아무 예고도 없이 따로 공작하여 제주극장에서 좌익일색의 건준을 개편하고 기존 건국준비위원회와 결별을 선언하고 중상모략하고 나섰다. 10월 10일에는 홍순령, 최남식을 중심한 우익인사들이 대책을 논의하고 제주향교에서 모여 우익인사들로만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 각 읍·면·리에서도 좌·우익의 건준으로 분리하여 각기 활동하게 되었다(14쪽)

10월 9일 분열된 이후의 우익 건준은 거의 은퇴 잠적하였고, 좌익계 건준은 계속하여 미군정과 투쟁하며 우익인사에 대하여 치안대를 시켜 테러를 자행케 하였다(20쪽).

이를 종합해 보면, 제주도 건준의 결성당시에는 악질적인 친일파를 제외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념적 성향을 따지지 않고 건준에 참여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좌우익을 망라한 인사들로 결성된 건준이 미군정 실시이후 소위 우익과 좌익진영간의 계파 갈등으로 쪼개져 10월중에 2개의 건준이 결성되었다는 조남수의 주장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의 확인과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념적 성향이 서로 다른 2개의 건준이 동시 결성되었다는 것은 이때부터 제주도에서도 정치단체가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익이라고 하면 흔히 일제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으면 일제에 충성을 했던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등을 말하고, 좌익은 일제로부터 각종 탄압과 박해를 받으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사회주의자와 독립운동가 등을 지칭한다. 8·15 해방이 되자 그동안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웠던 항일투사들이 영웅시 되고 우익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인민위원회의 결성일은 언제인가?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 숙제로 남아 있는 제주도 인민위원회의 결성일에 대해 토론해보자. 인민위원회의 결성일을 제일 먼저 세상에 알린 것도 김봉현·김민주이다. 이들은『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1963)에서 島인민위원회는 9월 22일 그리고 邑인민위원회는 9월 15일에 결성되었다고 했다. 이후에 출판된 문헌과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이를 정설처럼 계승하여왔다. 다만 존 메릴(1980)만 유일하게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9월 23일에 설립되었다(27쪽)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건준 제주도지부가 9월 23일 결성된 게 확실해진 이상 인민위원회의 결성일과 관련된 기존 문헌의 기록도 전부 수정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민위원회가 제주도 건준보다 먼저 결성되었다고 하는 게 논리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봉현·김민주는 무슨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폈을까? 아무런 근거없이 이러한 주장을 폈을까? 그렇지 않다고 추측된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변론을 한다면, 나는 그 근거들이 앞에서 살펴본 제주주둔 제58군 사령부 전보문 속에 전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전보문을 살펴보자

이를테면 9월 21일자 전보문은 “15일 제주민중대회에 바로 응하여 도내 각지에 ‘건국위원회 준비위원회’의 명칭 하에 민중조직 공작(工作)이 활발히 진전되고 있다.” 라고 보고하였다.

이 전보문에 따르면 ‘읍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는 9월 15일’은 ‘건국위원회 준비위원회’ 결성을 위한 민중대회가 개최된 날이다. 이 내용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인민위원회의 결성일(9월 22일)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김봉현과 김민주는 9월 23일에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는 소식을 인민위원회가 결성된 것으로 잘못 전해들은 것 같다. 존 메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오류는 공식적 문서나 1차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제3자가 전해주는 정보와 부정확한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나타난 결과들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의 제시한 <표1>의 문헌과 자료만으로는 도건준이 제주도 인민위원회(지방자치정부)로 언제 재편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것 또한 학계의 과제로 남겨둔다.

◆ 도건준의 초기 활동과 관련

마지막 남은 과제는 제주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초기 활동과 관련된 것이다.

도건준이 결성되자마자, 이들의 대표들이 <워달- 文達>(미군정 법무관) 島司 代理인 千田 사무관, 서장, 永津 군사령관 등과의 회담에서 아래의 3개 항목에 대해 직접 구두로 요구했다는 설(김봉현 ·김민주, 1963, 16쪽)과 도사와 58군 사령관 등에게 문서로 요구했다는 설(김봉현, 1978, 95쪽 ; 조남수,1988, 12쪽)이 있다.

1.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을 위한 정치활동에는 절대 간섭과 방해를 말 것.

2. 일군(日軍)과 경관(警官)은 즉시 무장해제 할 것.

3. 행정은 건준(建準: 약칭)이 도(島) 읍(邑) 면(面)의 결성과 함께 양도할 것 .

전자와 후자 가운데 어느 쪽의 주장이 더 사실에 가까운지 알아보자.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는 ‘제58군 전보문’과『조선인민보』의 기사 그리고 김봉현 ·김민주의『 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의 기록 등을 들 수 있다.

아래의 내용은 9월 30일 제58군이 조선군에 보낸 전보문이다.

△ 30일 일본사람을 업신여기는 제주도민의 언동이 증가.

△ 금일 법무국장 제윗달? 소령 도청 방문, 주재사무관 이하 후니프? 관리 및 도민 유력자를 모아 행정사법일반에 대해 호우쥬진?(아놀드 소장 포고의 나무휀(ナムフエン)을 명시하고 또 조선인 변호사 3명을 각각 판사, 검사로 임명했다.

이 전보문에 따르면 9월 30일 법무국장 제윗달(우달: Emery J. Woodall) 소령이 제주도청을 방문했다. 우달의 제주도의 방문목적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 분해되고 붕괴된 사법구조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변호사를 면접하고 곧바로 최원순(崔元淳)을 제주지방법원장 겸 판사로, 검사장에 양홍기(梁洪基), 검사에 박종훈(朴鍾壎)을 임명하였다.

주한미군사(3편) 제5장<사법부의 재건 및 재편(Restoration and Reorganization of the Judiciary)에서는 제주도 사법부 재건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법부장(註: 우달을 말함)은 인구 250,000명의 제주도에 판사나 검찰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난 후인 1945년 9월 30일, 김영희와 함께 제주도로 날아갔다. 그는 변호사들을 면접하고 지방법원 판사와 2명의 검사를 임명했고 그들에게 하위 직책에 대한 임명권을 위임했으며 소송절차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같은 날 서울로 돌아왔다. (註 우달: 사법부의 재편, 3절; 주한미군사 원고, 제2부, 이전 것, 4장 L, 3절, 130쪽.)

한 두시간만에 중요한 자리에 상기의 인물들을 임명할 수 있었던 것은 우달이 제주도를 방문하기 전에 제주도의 붕괴된 사법구조를 복원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키 위해 조선변호사협회로부터 사전에 정보와 명단을 받아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우달은 이날 제주도청에 주재사무관 이하 관리 및 도민 유력자를 모아 놓고 행정·사법 일반에 대해 아놀드 소장의 포고령을 명시했다. 여기서는 말하는 아놀드 소장 포고령은 9월 14일 아놀드가 군정장관 취임 후 첫 번째 발표한 “정치단체, 시민 등의 경찰력 행사를 금함” 이란 제목의 성명을 말한다.

이 포고령은 1945년 9월 14일 남조선(북위 38도 이남) 군정장관 A.V.아놀드 소장이 남조선에 대한 미군정의 통치방식을 알리기 위해 발표한 첫 번째 성명이다. ‘일제시대의 경찰기구’를 그대로 ‘미군정의 경찰기구’로 계속 운영하며, 경찰관에게는 무기의 휴대, 체포, 법규 및 질서의 유지 임무가 부여되었던 반면에 조선민중의 치안유지 행동을 금지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 성명서의 핵심은 친일파와 그 잔재세력을 공식적으로 등용하겠다는 것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제주도에서는 이 성명서가 중앙과 달리 미군이 제58군 사령부로부터 항복문서를 접수하기 위해 1945년 9월 28일 제주도에 상륙하기 3일전인 9월 25일 『제주신보』 호외판으로 제작 살포되었다. 길가에 뿌려진 삐라는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을 꿈꾸고 있던 도민들에게는 일제대신 이번에는 미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아주 김새는 내용이었다. 발행주체가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당시 태평양 전쟁 막판에 다 달아서 주민계도용 『제주신보』가 조선총독부의 지시로 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미군이 제주상륙을 앞두고 일본군에게 지시하여 발행 배포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명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정치단체, 시민 등의 경찰력 행사를 금함

아놀드 군정장관 성명

미국육군 제24군사령부 군정부 발표(1945년 9월 14일)

조선(북위 38도 이남) 군정장관 A.V.아놀드 소장은 오늘 다음과 같이 성명했다.

1. 연합국군 최고사령부 포고 제1호 제2조에 의해, 현재의 조선(북위 38도 이남)에서의 경찰기구는 그 기능을 계속한다.

2. 정치 단체, 귀환병단(歸還兵團) 또는 그 밖의 일반시민대가, 경찰력 및 그 기능을 행사하던지 또는 행사하고자 하는 것을 금한다.

3. 현재의 경찰기구는 종전의 일본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군정장관인 본관 밑에 운영되는 그 조직의 실권은 본관이 부여한다. 또 그 조직은 헌병사령과 슈이크(シユイツク 代將)준장에게 직속한다.

4. 경찰관은 본과에 의해 다음의 직권이 부여된다.

① 무기의 휴대

② 체포

③ 분쟁의 진압

④ 법규 및 질서의 유지

⑤ 조선인 및 일본인으로 구성되고 있는 현재의 경찰관은 종국적으로는 모두 조선인에 의해 조직되어야 할 것이며, 유능한 조선인이 채용되고 훈련되는 대로 점차적으로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주) 상기 포고문 제1호 제2조는 다음과 같다.

정부, 공공단체 및 그 밖의 명예직원 및 고용인의 모두, 아울러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하는 모든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직원과 고용원은 유급 또는 봉사 등의 구분을 불문하고, 중요한 직무에 종사할 것이며 별도의 명령이 없는 한 종래의 직무에 종사해야 하고 특히 그 모든 기록 및 재산보관에 임할 것.

<濟州新報, 號外, 1945년 9월 25일>

다음은『조선인민보』 1945년 10월 10일자 기사의 전문이다.

제주도는 평화경(境) / 법무국 김영희(金永羲)씨 귀임담

조선이 해방된 지 어언 두 달. 그동안 남쪽바다 섬나라 제주도는 어떻게 되었는지? 일본군이 성루(城壘)를 쌓고 최후까지 저항한다고 도민을 구사(驅使)하여 갖은 폭악을 한다는 등 미군 폭격에 쑥밭이 되었다는 등 가지가지 풍설이 떠돌고 있었는데 지난 일요일 군정청 법무국장 우달 소좌와 동행하여 군정청의 요무(要務)를 띠고 첫 번 특사로 제주도에 날은 김영희씨는 해방된 제주도 오곡풍양(五穀豊穰)한 평화경 제주도의 소식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제주도는 두 달 동안이나 본토와 유리되어 매우 궁금하였었는데 지난 일요일 비행기로 우달 소좌와 날아가 보니 상상과는 전연 딴판이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궁금하던 8만 일본군인들은 벌써 상륙한 미군의 손으로 무장이 해제되고 염려하던 폭격의 피해도 근소하였다. 도 감독관 천전(千田)을 비롯하여 행정기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치안상태는 극히 평온하였다. 도사(島司) 외 변호사 유림 건준(建準) 등과도 회견하고 변호사 최원순(崔元淳)씨 양홍기(梁洪基)씨 박종훈(朴鍾壎)씨 3인에게 지방법원사무를 임시로 위촉하여 도내의 치안을 맡아보게 하였다.

도내의 식량사정은 몇 해만에 풍양의 가을을 맞이하여 조금도 염려할 것 없고 제주읍 거리거리에는 산해의 진미가 흩어져 있어 온화한 인정풍속은 마치 도원경을 연상시켰다. 부족한 것은 의류와 연료인데 특히 전기를 일으킬 석탄은 앞으로 2개월분 밖에 남지 않아 군정당국의 수송이 될 때까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절약하도록 말하였다.

도내의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가 61개소, 농업학교가 하나 있는데 조선인 교원의 힘으로 재개하도록 하였다.”

이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9월 30일 우달이 제주도청에서 주재사무관 이하 관리 및 도민 유력자를 모아 놓고 행정·사법일반에 대해 아놀드 소장의 포고령을 명시하고 회견하는 자리에 건준 대표들이 참석했었다는 사실이다.

『 濟州島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에서 말하는 건준과 에모리 우달 등과 회담은 아마도 이것을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즉 미군정의 통치 방침을 설명하는 이 자리에서 건준 대표들이 그와는 정반대되는― 앞에서 말한― 3가지 요구사항을 우달에게 전달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건준의 3개 항목의 요구사항은 도사(島司), 경찰서장 그리고 제58군 군사령관에게 문서로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다른 하나는 군정청 법무국장 우달 소좌와 동행하여 제주도를 방문하였던 김영희는 “도 감독관 천전(千田)을 비롯하여 행정기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치안상태는 극히 평온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註: 김영희는 예일 대학에서 정치학과 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8·15 해방이후 우달 사법부장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도사 천전은 전라남도 내무부장으로 재직중에 1945년 5월 3일자로 제주도 도사로 임명받은 자이다(김봉옥,2000, 346쪽).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9월 30일 회담 당시까지만 해도 치안유지활동은 일본군인(日軍)과 일경이 담당하고 있었고. 도(島)행정도 역시 일본총독부가 5월 3일 임명한 島司 천전이 장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9월 30일 이전까지는 제주도 건준이나 인민위원회에서 제주도 행정 및 치안 유지권을 접수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으로 <표1> 의 제시한 문헌내용과 제주도에 주둔한 제58군 사령부의 전보문을 중심으로 건준과 인민위원회 등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의문사항 등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지금까지 알려진 건준과 인민위원회의 결성일, 건준의 3개 요구사항 건의 방법, 제주도 행정과 치안유지권 접수 여부 등이 일본군의 전보문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명확히 드러났다.

<참고사항>

츠카사키 마사유키는 제주도 주둔 제58군 사령부의 전보문과 관련해, 이 전보문은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주관과 관찰에 근거하여 작성된 자료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알아차리지 못한 제주도 민중의 활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면서. 전면적으로 신용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전보문은 『주한미군사』와 『G-2보고서』 기술과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많고 일시와 수량 등의 기술에 관해서는 거의 신용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필자) 약력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2023년 7월 현재 그는 제주대학교 명예교수(언론홍보학과)로 활동중이고, 2019년 12월에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상(언론ㆍ출판부문)’을 수상한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제주언론 돌아보기1>, <제주언론의 보도방식과 수용자>(공저), <언론이 변해야 지역이 산다: 지역언론의 정체성과 과제>, <브랜드 홍보론>(공저), <고영철 사회비평집: 구라(口羅)>, <지역신문정책과 지원효과>(공저)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캠페인관련 뉴스 프레임 및 뉴스정보의 출처에 관한 연구: 국내 5대 일간지의 세계7대 자연경관선정캠페인 보도를 중심으로” , “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가?-제주신보 김호진 편집국장과 인민군사령관 이덕구 명의의 삐라인쇄사건 기록을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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