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길현의 제주 미래담론] (26) 포퓰리즘을 옹호하는 하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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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현의 제주 미래담론] (26) 포퓰리즘을 옹호하는 하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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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현상이나 입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쉬운 길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화가 무어냐 물으면, '전쟁이 없는 상태'로 정의하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를 대동소이하게 떠올릴수 있기때문에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평화는 무난히 이해되곤 한다. 전쟁에 대해 부정적일수록 그에 대비되는 평화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또 예를 들어 정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거짓을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거짓에 대해서는 누구나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을것이어서 정직은 바람직한 태도이자 윤리로 널리 호칭된다.

최근 포퓰리즘이 회자되고 있다. 정치권에서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만큼이나, 포퓰리즘은 문제의 소지가 큰 정치적 태도이자 입장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그런데 만약 포퓰리즘이 부정적이라면, 통상 포퓰리즘에 대비되는 것으로 논의되는 엘리트주의는 바람직한 태도이자 신조일 수가 있겠는데, 과연 그런가? 포퓰리즘 못지 않게 엘리트주의도 일반적으로 바람직 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보면, 오히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포퓰리즘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공세로부터 이를 옹호하고 제 위치를 찾도록 하는 게 아닐까.

사전적 의미로 포퓰리즘은 '대중의 견해와 바람을 대변하고자 하는 태도와 입장'이다. 이는  엘리트주의와 분명히 대비된다. 왜냐하면 엘리트주의는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태도와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대중민주주의 시대인 21세기 오늘날에도 포퓰리즘은 널리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엘리트주의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그와 대비되는 포풀리즘 역시  부정적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무얼까?

그건 포퓰리즘을 대중영합주의라는 것으로 부정적인 선입관을 반영하는  번역 때문이다. 포퓰리즘을 대중주의 또는 인민주의라는 상대적으로 중립적인 개념이 아닌  대중영합주의로 번역할 경우, 포퓰리즘은 대중의 견해와 바람을 이른바 선거공학적 차원에서 '무책임하게 또는 무분별하게' 대변ㆍ추동ㆍ영합하고자 하는 엘리트주의의 변용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때 대중은 잘 알지도 못하연서 격정에 휘둘리는 우매한 다수의 집단으로 설정된다. 이렇게 분별력이 부족한 대중의 단견과 편견에 호응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큰 것으로 설정된다. 이렇게 보면 대중영합주의라는 호칭은 전적으로 무지한 대중믈 호도하는 특정 엘리트에 대한 다른 엘리트의 정치공세에 다름 아니게 된다. 

대중영합주의라는 의미로서의 포퓰리즘은 무분별한 것으로 상정된 대중의 의견과 바람을 등에 업은 엘리트주의일 뿐 더이상 대중ㆍ인민이 주체가 되고 주인이 되는 이른바 대중주의가 아니다. 이렇게 포퓰리즘을 대중영합주의로 대치하게 되면, 남는 건 무지한 대중과 그들을 호도하는 무책임한 엘리트만 존재하고, 이를 비판하는 자는 전지전능의 엘리트로 화하게 된다.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대중영합주의란 호명은 더 이상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대중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대중의 견해와 바람을 대변하도록 하는 대의민주주의는 본질에 있어서 엘리트 민주정이다. 대의민주정 하에서 어느 엘리트든 대중의 견해와 바람을 제대로 잘 대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일 이라, 여기서 재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성별ㆍ나이ㆍ출신ㆍ직업ㆍ종교 등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라도 정치 엘리트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는 열려있는 개방된 민주정이기는 하다. 그렇게 열려있는 만큼은 대의민주주의의 유용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대중을 대변하는 선거 당선자로서의 정치인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대의민주정이 엘리트주의임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대의민주정은 '인민의, 인민을 위한'정부이지만, 인민에 의한 정부'는 아니다. 오히려 '선거에서 당선되어 일정 기간 동안 인민의 대표로서 역할을 할 엘리트에 의해 운용되는 정부'라고 보는 게 더 현실에 가깝다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향후 현실적인 대의 민주정은 불가피하게 대중주의와 엘리트주의의 다양한 조합으로 운영되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20세기는 과거의 완강한 엘리트주의의 지배에 균열을 내고 이른바 대중주의를 고양시켜 나간 민주화의 시기였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시대인 21세기는 직접 민주정의 다양한 제도와 기제를 개발해 나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포퓰리즘을 정치 엘리트 간의 편협한 정치공방의 도구에서 벗어나 보다 견실한 대중주의로서 기능할수 있도록 하는 데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엘리트의 선도적 역할과 전문성을 충분히 인정 하면서도,  대중의 견해와 열망에 대한 최대한의 존중을 기저에 두고 대의민주정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는 얘기이다.

오늘날 한국은 25~65세 성인 가운데 46.86%가 전문대 이상을 졸업한 고학력 사회이다. 이 수치는 세계 4위로 한국의 대중은 질과 양에서 세계적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수준높은 한국 대중의 역량이 됫받침 되어 있기에 한국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와 혁신을 이루고 있다. 박정희의 경제성장,  김대중의 민주화, 정주영ㆍ이건희의 글로벌 기업화 모두가 우리네의 남다른 대중적 역량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현대사를 이끌어간 리더들은 충분히 엘리드들이지만 동시에 유능한 포퓰리스트였다고 본다.  무작정 대중영합이라고 호칭하기 전에 능력있고 성과를 보이는 포퓰리스트를 더 바라고 싶다. 대중영합주의라며 대중의 역량을 무시하는 엘리트는 그만 정치권에서 내려오는 게 어떤가.  대중의 견해와 바람을 대변하는 걸 포퓰리즘으로 공격하는 구태의연한 엘리트 간 치기어린 공방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폐쇄적이고 자기들만의 리그인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는 과정 그 자체가 포퓰리즘의 복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양길현 제주대학교 교수 ⓒ헤드라인제주
양길현 제주대학교 교수 ⓒ헤드라인제주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엘리트집단을 꼽으라면 법조계를 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는 지난날 육법당으로 불리우던 군ㆍ법 등 과거의 특정 전문가들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부응하는 융복합 창의적 엘리트들의 시대가 될 것이다. 

기업 마인드와 대중적 호응성 그리고 인공지능 활용 능력을 갖춘 새로운 열린 엘리트들이 등장할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자영업자ㆍ무직자ㆍ고령자 등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어려운 대중들의 바람을 대변하는 정치인에 대해 쉽게 포퓰리즘으로 정치공세를 펼치는 캐캐묵은 정치엘리트들은 올 보궐선거와 내년 대선 및 지방선거에서 대거 퇴출되길 기원해 본다. 이런 과정에서 포퓰리즘이 제대로 자리하길 소망해 본다. <양길현 / 제주대학교 교수>

*이 글은 헤드라인제주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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