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보 기자 김호진, 1948년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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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보 기자 김호진, 1948년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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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신문의 날 특집] 김호진 제주신보 편집국장 생애 (3) 제2대 편집국장으로...

그가 1947년 8월 27일 독립신보 기자(사회부차장)를 그만둔 후, 제주신보 제2대 편집국장으로 영입될 때까지, 그의 행적에 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 후의 이력도 마판가지이다.

그에 관해 궁금한 사항을 알아보기 위해서 우선 김호진을 편집국장으로 기용한 분으로 알려진 박경훈 사장이 등장하기까지의 제주신보사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간략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제주신문50년사>를 보면 제주신보 창간·등록 당시의 운영체제는 주식회사도 개인기업도 아니었다. 제주민보(제주신보 전신)의 창간멤버는 김용수(金瑢洙, 20세), 이기형(李琪亨, 21세), 문종욱(文鍾郁, 20세), 고광태(高光泰, 20세), 박광훈(朴光壎, 20세), 박태전(朴太全, 21세) 등 6명이고, 11월에 이기형은 교원양성소에 입교하기 위해 떠나고, 이영복과 고영일이 기자로 증원되었다. 초대 사장은 김진수, 편집국장은 백상현이었다(1997, 278쪽).

조합체 조직으로 창간한 제주신보는 1년 내내 인쇄비·인건비·용지대 등으로 경영난에 허덕이자― 정확한 날자는 알 수 없지만― 황순하·윤성종·백찬석·홍종언·김석호·박영훈·신두방 등 도내유지 7인이 나서서 제주신보사를 법인 조직화하기로 하고 사장에 김석호, 전무에 백찬석을 선임하였다(제주신문사, 1995, 279쪽). 제주신보사가 1947년 1월 1일부터 법인조직으로 재출범한다고 하는 사실을 사장 김석호·전무 백찬석 명의로 제주신보 신년호 지상에 발표하였다. 이 사고(社告)를 보면 신문사 사장이 김진수에서 김석호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소장되어 있는 1947년 1월 1일부터 1948년 4월 20일까지 발행된 신문을 보면 두 차례의 기자모집(1947.01.26., 1948.02.22.)과 3차례의 인사발령이 있었다.

기자모집과 관련 합격자를 발표하지 않아 누가 채용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기자발령과 관련해서 1947년 8월부터 12월 중순까지 3차례 대대적인 인사가 있었다.

1947년 8월 2일자 신문사령을 보면, 1일자로 신문사 편집국기구를 확대 개편하고 대대적인 승진인사가 단행되었다. 인사내용을 보면, 서울특파원이었던 金瑢洙를 정경부장 겸 문화부장으로, 高瀛一 기자를 편집부장 겸 취재부장으로, 申昌松 기자를 조사부장 겸 사회부차장으로, 승진발령하고 宋鍾化를 목표 지국장 겸 기자에 그리고 高子允을 목포지국 총무에 각각 임명하였다. 이처럼 한 사람이 2개 부서장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아, 편집국 기구 확대개편에 맞게 인력을 충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약 5개월 뒤 12월 6일(토요일) 사령을 보면, 제주신보는 11월 24일자로 또다시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하였다. 즉, 백상현(白尙鉉) 주필 겸 편집국장, 김영택 영업국장 겸 논설위원, 김용수(金瑢洙) 정경부장 겸 문화부장, 고영일(高瀛一) 편집부장 겸 취재부장, 고광택 사회부장, 신창송(申昌松) 조사부장 겸 사회부차장, 이경문(李京文)・김삼규(金三奎) 기자 등 8명을 일거에 의원면직 시켰다. 인사내용으로 보아 문책성 인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일주일 후인 12월 1일자로 백상현은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복직되고 김용수와 고영일은 기자로, 이경문은 영업국 직원으로, 임한경(任漢暻)과 김윤옥(金潤玉)은 통신원으로 발령하였다. 이때 부장급이었던 김용수와 고영일이 기자로 발령받자, 이들은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이와 같이 1947년 12월 말까지도 김호진이라는 이름은 제주신보 기자 및 간부명단에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해가 바뀌고 피바람 부는 4·3사건을 몰고 온 1948년이 시작되었다.

제주신보사가 경영난 타개를 위해 법인조직체로 재출범한지도 1년이 지났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은 계속되었던 것 같다. 그 증거로는 1948년 2월 16일자 신문지상에 게재된 <주식회사 제주신보사 창립사무소 발기인 대표 박경훈·백찬석> 명의의 ‘제주신보 주식모집공고’를 들 수 있다. 주식 모집기간은 2월 20일까지로 되어 있다.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박경훈씨가 신문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것이 바로 이 공고이다.

나는 주식 모집공고가 나가기 이전인 2월 중에 신문사의 임원진들과 박경훈씨 사이에 모종(某種)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주식모집 발기인 대표로 참여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제주신보사 사장이 김진수 또는 김석호에서 박경훈으로 언제쯤 교체되었을까? 이 시기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김호진을 편집국장으로 기용한 사장이 박경훈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록에 따라 박경훈 사장과 김호진 편집국장의 등장시기가 다소 다르게 나와 있다.

진성범의 저서 <제주반세기: 다큐멘터리 그 때 그 사건>에는 김호진 국장이 일본에서 귀국한 후 고향에서 문학의 꿈을 키우고 있던 중 만27세가 되던 해인 1948년 초 김용수 국장이 퇴사하자 朴景勳 사장에 의해 3대 편집국장으로 기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진성범, 1997, 69-71쪽).

이문교의 <제주언론사>에는 백록일보 제작자들은 신문편집을 둘러싸고 제주신보파 기자들과 갈등 빚는 일이 많았다. <…중략…> 이 사건으로 수세에 몰린 백록파 기자들은 물러나고 김호진(金昊辰)만 남아 제2대 편집국장으로 재임시 좌익무장대의 불온 선전물을 인쇄한 혐의로 군 당국에 의해 처형당했다고 나와 있다(이문교,1997, 139쪽).

특히 제남신문사 대표이사였던 김윤옥 사장은 자신의 저서 <虛空에 塔을 쌓을 수는 없다: 초창기 제주언론의 주역들>에서 김호진은 백록회에서 발행한 백록일보에 입사했다가 백록일보가 제주일보에 흡수 통합되자, 정기준·고봉효와 함께 제주신보로 왔다가 만 27세가 되던 해인 1948년 초에 제2대 편집국장으로 기용되었고, 또한 제주도의 초대 도지사를 역임한 박경훈은 1848년 2월부터 8월까지 제주신보 사장을 역임했다(김윤옥, 2000, 195쪽)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이 출처를 적시(摘示)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우선 박경훈씨가 1948년 초 또는 2월부터 제주신보 사장으로 취임했다는 것은 그의 경력을 잘못 추측하고 쓴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1948년 4월 20일까지 발행된 신문의 판권난을 보면, 법인체 조직으로 출범한다고 사장 김석호, 전무 백찬석의 명의로 공고한지 1년 3개월 이상이 경과했지만 조합체 조직으로 운영되던 시절처럼 편집 겸 발행인은 김진수이고 편집국장은 백상현으로 표기되어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보아 김석호는 당시 신문경영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김익렬 장군의 실록 유고 <4·3의 진실>에 실린 내용을 들 수 있다. 김장군의 유고에 따르면, 박경훈씨와 제주신보 사장(김씨)은 4월 중순경부터 미군정청과 김연대장의 요청에 의하여 무장대의 귀순공작 계획을 짜는 모임에 여러 차례 참석하였던 것으로 나와 있다. 그 기록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註: 이 글은 제민일보 4·3 취재반에서 발간한 <4·3은 말한다(2)> (부록)(273-357쪽)에 실려 있다.)

제주도 민군정 장관 맨스필드 대령은 나더러 폭도와 직접 담판하라고 명령하였다. 내가 다섯 번째 지명자가 된 것이다. <…중략…> 그러면서 그는 귀순공작의 요점을 알려주면서 민간인을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이라고 일어주었다.

민간인이 제주도의 사정에 밝을 뿐만 아니라 도민의 감정을 판단하는 데 확실한 근거가 된다고 했다, 단, 도민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야지 원성을 사는 자를 기용하면 도민이 협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는 제주도 유지들의 명단을 내 놓았다. 각자의 성분까지 분석한 잘 조사된 명단이었다. 그 중에서도 3명을 추전하면서 이들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제주신보 사장 김씨와 박경훈(朴景勳)씨 형제 등 3인이었다.

…<중략>…그리하여 나의 비밀참모 역할을 하게 된 인물들은 제주신보 사장(김씨)을 중심으로 한 박경훈씨 형제, 좌달육· 金大用씨 그리고 읍내 천주교 신부와 몇몇 신자였다. 우리는 비밀회합 장소로 박경훈 씨 댁을 결정하고 귀순유도를 위한 선무문과 전단문을 작성하고 폭도들과 접촉방법을 연구하는 등 하평공작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일체의 인쇄는 비밀리에 제주신보사에서 책임졌다. <이하 생략> (1948년 4월 20일 ) 김익렬 9연대장은 ‘先선무 後토벌’ 원칙을 세워 ‘귀순자는 안전과 생명을 보장하며 반도들의 요구조건이 있으면 회담을 통해 해결하자’는 요지의 각종 전단을 L-5비행기로 제주각지 부락에 살포했다. 때로는 지형정찰도 겸하여 내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전단이 살포된 다음날 회답삐라가 각지에서 발견되었다.

드디어 나는 폭도들의 요구조건을 전부수락하고 홀로적지에서 회담하기로 결정하였다.

회담시간은 4월 28일 오후 1시이며 장소는 폭도들이 안내하겠다는 것이었다.<…생략> 수행자는 지프 운전병과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 이렇게 3명이었다( 319쪽, 이윤락 씨는 박경훈 씨도 동행했다고 증언하고 있다-편집자주)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최소한 4월 20일까지는 김씨라는 성을 가진 분(註:판권란 표기로 보면 김진수라고 생각됨)이 신문사 사장으로 이 모임에 참석했던 게 확실해 보인다.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이와 같은 여러 기록과 주장을 종합해 볼 때, 박경훈씨가 사장에 취임한 시기는 1948년 4월 말에서 5월 초순경일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제주신문50년사>에 따르면, 4·3사건 발발 이후 제주신보가 20여일간 휴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제주신문사, 295쪽).

언제부터 언제까지 신문발행이 중단되었다는 기록이 없지만, 신문 발행이 중단되었다면 4월 20일 이후부터 20일 정도가 된다. 이 기간 중에 박경훈 사장이 취임하고 곧바로 김호진을 편집국장에 기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제64회 신문의 날에 즈음해 기획된 이 글은 총 4회에 걸쳐 연재되고 있습니다.  <고영철 /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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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언론의 주역 2020-04-27 08:43:02 | 211.***.***.155
표현의 자유가 극도로 억압받았던 암흑의시대 언론인으로서의 사회적책임을 다한다는것이 주변 언론인게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자극이었을까 불편함이었을까? 오늘날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신 자본주의시대에 강한 화두를 던지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