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의 재물이 된 김호진 편집국장의 생애를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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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의 재물이 된 김호진 편집국장의 생애를 더듬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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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4회 신문의 날 특집] 김호진 제주신보 편집국장 생애 (1) 별똥별같은 사람

김호진(1920.∼1948. 11.)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 그에 관한 기록도 거의 없다 시피하다. 그것은 그가 어느 날 제주언론계에 불현듯이 나타나, 별똥별처럼 사라졌기 때문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제주 4·3사건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하던 1948년 10월 24일 좌익무장대 최고 지휘관 이덕구(李德九) 명의의 대정부 선전포고문과 호소문을 제주신보사에서 인쇄해주었다는 혐의로 군정당국에 의해 구속되었다가 그해 10월 31일경에 처형당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문건을 인쇄해준 혐의로 군정당국에 의해 총살당한 김호진은 어떠한 인물이었는가? 그는 1920년 제주도 서귀포에서 노부부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하며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종 문헌을 통해 지금까지 파악된 그의 한자 이름은 세 개다. 일본에서 출판된 文國柱의 <朝鮮社會主義運動史 事典, 1981>에서는 金昊震이라고 쓰고 있고, 제주지역에서 출판된 언론과 4·3관련 책속에서 부르는 이름은 金昊辰이다. 그리고 <한국언론연표> 제2집(桂勳慔 편, 1987)에 나오는 독립신보의 기자이름은 金虎振이다.

그는 8·15해방이 되자, 조수인(趙壽仁)・정기준(鄭基俊)・고봉효(高奉孝) 등과 함께 1945년 11월중순경 남문로(南門路)에 있는 한 인쇄소에서 <白鹿日報>를 창간하였다(강용삼·이경수, 1984, 995쪽).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2개면으로 발행되었다는 설도 있고, 4개면으로 발행되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 소장된 신문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발행면수와 내용 그리고 발행인과 편집인 등이 누구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1945년 10월 1일 창간된 제주민보(註: 인민위원회 산하 문화부에서 9월 28일 창간했다는 설도 있음)에 이어 백록일보가 창간되면서 제주언론과 독자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뉴스보도 경쟁시대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두 신문의 재정난은 결국 두 신문의 통합을 추구하는 여론을 형성시켰으며, 이에 따라 보도경쟁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그 해 12월경 후발주자인 백록일보는 1회 발간하고 제주신보에 흡수되는 형식으로 통합되고 말았다(강용삼・이경수, 1984).

통합 당시 백록일보의 창간 멤버들도 제주민보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통합 후 첫 신문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 주도권을 놓고 두 신문사 기자들 간의 난투극이 벌어진다. 두 신문의 통합 후 첫 수난이자 내분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 대해 강용삼과 이경수(1984, 995-996쪽)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945년 12월 16∼25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 등 3국 외상회의에서 한반도에서의 신탁통치안에 합의하고 향후 5년간 미-영-중-소 4개국 통치하에 한국독립을 조성키로 하는 한편,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의 설치를 의결하고, 그 결과를 12월 28일 발표하였다.

이 협정 내용이 발표되자, <…중략…>정국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찬-반탁의 충돌과 좌우대결의 극한 상황을 향하여 치닫기 시작했다. 그 여파는 제주도에까지 밀려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도민의 반발은 거센 성토로 들끓었다. 1월 상순 어느 날 기사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김용수는 무심결에 공무국을 들여다보았다. 김용수는 그때 마침 백록파 기자들이 머리기사를 박현영의 찬탁성명으로 편집 조판하는 것을 보고, 조판 중인 활자를 맨손으로 밀어붙여 헐어버렸고, 이후 「백록」에서 건너온 기자와 제주신보 기자 간에 난투극이 벌어져 사내는 온통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역부족인 백록파가 물러남으로써 사태는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기도는 보기 좋게 좌절되고 말았다.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고영철 제주대 명예교수 ⓒ헤드라인제주

당시 조판 중이었던 활자판을 모두 헝클어 버렸던 김용수 기자도 1965년 11월 10일자 창간 20주년 기념 특집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신문사에 좌익세력의 침투로 社內는 한때 <조판>을 뒤엎는 등 사상충돌이 연속되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들 기록처럼 당시 이념투쟁에서 수세에 몰린 백록파 기자들은 어쩔 수 없이 제주신보사를 떠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제주에 있었던 김호진을 비롯한 백록파 기자들의 1-2개월 동안의 행적들이다. 그렇다면 1946년 1월경 제주신보에서 쫓겨난 김호진은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기용될 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지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언론연표』 제2집에 따르면, 그는 제주신보 편집국장으로 기용되기 전까지 독립신보 기자로 활동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제64회 신문의 날에 즈음해 기획된 이 글은 총 4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고영철 /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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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2020-04-11 14:57:16 | 39.***.***.194
1948년 대한민국, 그리고 제주. 당시는 정말 어마무시했네요 맘에 안드는 내용의 글을 인쇄했다고 언론인을 총살하는 시대...언론의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라야 함이 마땅하지만 반대로 행함이 마땅치 않다하여 처형...작금의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