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년 전 어린 소년들에게 채워진 족쇄, 이제는 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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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년 전 어린 소년들에게 채워진 족쇄, 이제는 풀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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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옥살이' 4.3생존수형인 2명, 제3차 재심 청구
고태삼.이재훈 할아버지, 72년 전 그들에게 어떤 일이?
1947년 미군정하 일반재판에 의해 옥고를 치른 고태삼(91. 사진 왼쪽 두번째) 할아버지와 이재훈(90. 사진 왼쪽 3번째) 할아버지가 2일 재심청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47년 미군정하 일반재판에 의해 옥고를 치른 고태삼(91. 사진 왼쪽 두번째) 할아버지와 이재훈(90. 사진 왼쪽 3번째) 할아버지가 2일 재심청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제주4.3 당시  영문도 모른채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제주4.3 생존수형인 2명이 72년만에 재심재판을 청구했다. 

제주4.3도민연대는 제72주기 제주4.3희생자 추념일을 하루 앞둔 2일 오전 제주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제3차 4.3수형 생존자 재심재판을 청구한다고 밝혔다.

이번 재심재판 청구인은 1947년 미군정하 일반재판에 의해 옥고를 치른 고태삼(91) 할아버지와 이재훈(90) 할아버지다. 

종전 1, 2차 재심재판은 4.3당시 불법 군법회의(군사재판)에 의한 피해자를 중심으로 제기됐던 반면, 이번 재심 청구인 2명은 미군정하 일반재판에 의한 피해자들이다.

당시 둘 다 10대 어린 나이로 인천형무소에 수감돼, 고태삼 할아버지는 장기2년 단기 1년형을, 이재훈 할아버지가 징역 1년을 복역했다.

고 할아버지가 경찰에 체포된 시점은 1947년 6월으로, 당시 고향 종달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18세 소년이었다. 이재훈 할아버지도 북촌마을에서 제주중학교 2학년에 다닐때인 1947년 8월 경찰에 끌려갔다.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는 "당시 미군정 하에서 이뤄진 불법 군사재판에서도 확인됐듯이 이번 일반재판도 재판은 받았지만, 재판다운 재판을 받지 못했다"면서 "재판을 하기 전 조사를 받은 내용도 없고, 특히 이 두분은 당시 소년이었다. 미성년자였고, 스스로 자기를 방어할, 자기를 대변하거나 변명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밝혔다.
 
실제, 고태삼 할아버지 증언에 따르면, 1947년 6월 6일 동네 청년들의 모임에 나갔다. 당시 모임 장소를 덮친 세화지서 경찰관 3명과 마을청년들과 충돌과정이 있었는데, 열흘 만에 집에서 경찰에 체포돼 세화지서로 끌려갔다.

그는 "세화지서에서 엄청나게 매를 맞기 시작해서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면서 "다음날 제주경찰서에 유치됐지만 누구에게도 어떤 조사도 받은 사실이 없다. 재판에서도 이름만 불렀을 뿐이다"고 말했다.

양동윤 대표는 "고태삼 할아버지는 동네청년 모임에 나갔다가 경찰관 3명과 마을청년들과의 충돌과정에서 경찰관을 때렸다는 누명을 썼다"며 "재심 재판에서 분명히 밝혀질 것이지만 고태삼 할아버지는 경찰관을 때린 사실이 없고, 판결문의 내용과 달리 고태삼 할아버지는 조사를 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이재훈 할아버지는 북촌리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1947년 8월 13일, 제주경찰서 경관들이 쏜 총에 북촌마을 주민 3명이 총상을 입은 현장에서 멀지 않은 북촌 버스정류장에서 서 있다가 마을사람들이 함덕으로 몰려갈 때 따라 갔다. 함덕지서 순경이 '너 누구냐? 어디사냐'고 하니, '북촌'이라고 말하자마자 곧바로 구금됐다. 다행히 마침 학교선생님이 계셔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경찰에 다시 끌려갔고, 무수히 구타를 당했다. 감금과 자백강요는 일주일 넘도록 계속되었고 밤마다 불려가 매를 맞았다고 했다. 

그는 "경찰서에 가자마자 두 발 묶어 발바닥을 마구 때록, 물고문도 당했다. '삐라'를 봤다고 말할 때까지 맞았다. 재판을 어떻게 받았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1947년 미군정하 일반재판에 의해 옥고를 치른 고태삼(91) 할아버지와 이재훈(90) 할아버지가 2일 제주지방법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다.ⓒ헤드라인제주
1947년 미군정하 일반재판에 의해 옥고를 치른 고태삼(91) 할아버지와 이재훈(90) 할아버지가 2일 제주지방법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다. ⓒ헤드라인제주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

기자회견에 배석한 고창훈 제주대학교 명예교수(행정학과)는 "두 분의 4.3수형 피해자들은 미 군정하에서 일반재판에 넘겨졌지만 경찰에 의해 조사를 받거나 최소한의 재판을 받을 권리도 무시된 채 옥고를 치렀다"면서 "경찰의 영장 등 절차도 없이 구타와 고문 끝에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철저히 무시된 재판이었다면 이것은 '초사법적 국가범죄'"라고 비판했다.

고 교수는 이어 "오늘날 이 분들의 재판기록은 판결문과 형사사건부 등이 존재합니다만 판결문 어디에도 두 분의 범죄 사실이 구체적으로 적시되고 있지 않다"면서 "1947년 미군정하 무고한 제주의 어린 학생과 어린 소년에게 가한 국가 공권력은 명백한 '국가범죄'"라고 강조했다.

양동윤 대표도 "이를 바로잡는 것은 사법정의를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며 왜곡된 4·3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며 "이분들은 구순 나이가 되어서야 평생의 을 풀기위해 이 자리에 나섰습니다. 70년 넘도록 전과자 신세로 살아온 누명을 벗기 위해 재심을 청구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법부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명예롭게 정리할 수 있도록 조속히 진실을 규명해 줘야 한다"면서 "72년 전 어린 소년들에게 채운 족쇄를 이제는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4.3도민연대와 2명의 청구인은 기자회견이 끝난 뒤 제주지방법원 민원실을 방문해 재심청구서를 제출했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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