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를 떠나던 곳 이섭정( 利涉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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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를 떠나던 곳 이섭정( 利涉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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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에필로그]

朝天舘(조천관)의 利涉亭(이섭정)을 새로이 단장하여 선보입니다.

옛날 탐라를 떠나려고 했던 사람들은 朝天舘浦(조천관포; 조천포구) 利涉亭(이섭정)에서 ‘저 바다를 건너면 이롭다(利涉)’는 간절한 마음으로 탐라를 떠났을 것입니다. 이제 출륙하기를 기다리던 利涉亭(이섭정)을 새로이 단장(丹粧)하여 선보이겠습니다.

※ 丹粧은 글을 문채(文彩)로서 아름답게 꾸민다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지금까지 조천관은 객사이고 연북정은 정자랜 허연 여러 번 묵은 먼지(오랫동안 잘못 표기된 오류)를 털어내더니, 이번엔 利涉亭(이섭정)을 단장해서 선보이겠다고? 게난 이섭정은 어디에 이시멍, 뭐허는디 쓰던 거라?”

제가 답하였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몰라 나신디, 지난번 청소(글을 쓰다)허단 주신(구입한)거난, 이제 알아보쿠다(알아보겠습니다).”

저는 그 귀하고 소중한 보배가 집에 도착하는 순간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했던 공자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멀리서 찾아온 그 귀중한 보석은 바로 이익태 목사의 탐라십경도 朝天舘(조천관) 그림이었습니다.

<탐라십경도 朝天舘의 利涉亭>

‘한반도와 바다’(2004년, 국립민속박물관 발행) 작자 미상으로 원본이 아니라, 19세기 그려진 사본이라고 하며, ○안이 利涉亭입니다.
‘한반도와 바다’(2004년, 국립민속박물관 발행) 작자 미상으로 원본이 아니라, 19세기 그려진 사본이라고 하며, ○안이 利涉亭입니다.

1702년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 비하여 년대가 8년 밖에 앞서지 않지만 한 눈에 봐도 3가지가 크게 다르게 보입니다.

① 현재 조천비석거리 바로 아래까지 바다로 배가 드나들었으며,

② 동쪽에 擧橋(거교)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이채롭고,(혹시 거교와 연북정 사이에 있는 4칸 건물은 회랑? 아니면 쌍벽루?)

③ 그 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利涉亭(이섭정)이 조천진성 밖에 세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利涉亭을 새로이 단장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선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관련 자료가 없어 선보일 생각이 없었는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는 것이, 일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탐라십경도 조천관」 원본이 혹시 누군가에 의해서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희망으로 경자년 새 아침에 생각을 바꿨습니다. 즉 탐라십경도 조천관은 관심 있는 몇몇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졌지만, 이섭정은 진흙에 묻힌 보석처럼 아무도 그 모습(진가)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 利涉亭을 선보이기 앞서 의혹스럽지만, 제가 확인하지 못한 내용은 미리 알리면서, 여러분이 사실과 스토리텔링 사이에서 혼란이 없도록 하고, 언젠가 탐라십경도 조천관 원본이나, 이섭정에 대하여 고증할 수 있는 자료가 발견되어서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기를 기다리며 단장을 시작하겠습니다.

① 1694년 탐라십경도 조천관과 1702년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이 그려진 년대의 차이는 10년도 채 안되는데, ‘거교’, ‘이섭정’은 전자에는 그려져 있는데, 후자에는 그려져 있지 않았고, ‘조천비석거리’ 아래 부분의 바다는 전자는 넓고 후자는 좁게 보이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② 그런데, 1841년 탐라지초본 조천진에 대한 기록 「삼면이 막히고 단지 통하는 문이 하나 있는데, 그 위에 초루를 설치하였다. 성안에 조천관과 연북정, 군기고가 있다.」(원문; 三面阻海 只通一門 上設譙樓 城內有 朝天舘 戀北亭 軍器庫)는 내용은, 탐라순력도 조천조점보다 오히려 년대가 앞선 탐라십경도 조천관의 모습을 보는 듯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탐라지초본의 내용은 당시 조천관의 모습을 직접보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 속에 쓰인 탐라십경도 조천관의 내용이거나 혹은 그림(병풍)을 보고 기록한 것은 아닐까요?

③ 「朝天舘 利涉亭」에 대한 기록은 아래 임형수 목사의 詩(시)와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 중 탐라십경도 조천관 편에 보이는 정자 이름 「利涉亭」이 전부로 다른 글은 확인이 안 되므로, 제가 쓰는 이 글은 利涉亭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섞은 스토리텔링 정도의 글이라는 것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 [朝天舘의 利涉亭]

제가 利涉亭에 대하여 아는 것이라고는 남사록에서 얼핏 그 제목을 봤던 기억이 전부라, 먼저 남사록에 쓰인 이섭정부터 찾아봤습니다.

가. 김상헌 안무어사의 남사록

利涉亭(이섭정)∥ 林亨秀(임형수)

朝天館外 石磯頭(조천관외 석기두)

烟草萋萋 雲日幽(연초처처 운일유)

滄海杳杳 人已遠(창해묘묘 인이원)

幾人腸斷 立汀洲(기인장단 입정주)

​​조천관 밖 돌 많은 해변가에

안개 머금은 풀들 무성하고 구름 낀 해 그윽하네

푸른 바다 아득히 사람들이 멀어져가니

이별을 슬퍼하며 물가에 섰던 이 몇이나 되는가?

▶시 제목에 나타나는 利涉亭(이섭정) 뿐입니다.

*林亨秀 목사; 1545, 11~ 1546, 10월까지 제주목사로 재임

 

나. 李益泰(이익태) 목사의 知瀛錄(지영록)

다음으로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 중 탐라십경도서 조천관 편을 확인하였습니다.

「朝天館은 (전략) 사면이 바다에 둘려 해조(海潮)가 물러가면 한쪽은 육지와 연결되기 때문에 거교(擧橋)을 만들어서 성문과 통하게 하였다. 여기가 바로 大小人員(높고 낮은 모든 벼슬아치)이 항해하러 왕래할 때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중략) 성 밑의 포구는 石埭(석태; 돌 제방)를 쌓았는데, 가운데에 수문(水門)을 열면 뱃길로 통하여 출입하게 되었다. 평상 때에는 그 안에 배를 두었고, 성 바깥의 하륙하는 곳에 利涉亭(이섭정)이 있다.」(이하생략)

(원문; 朝天舘은 (전략) 四面環海潮水 則一方連陸 因作擧橋以通城門 此乃大小人員航海往來時 待風所也(중략) 城下浦口 互築石埭

中開水門以通船路 出入 常時蔵船於其內 城外下陸處有利涉亭)

▶下陸(하륙; 배에서 육지로 내리는 곳)하는 곳에 利涉亭(이섭정)이 있다는 글뿐입니다.

*이익태 목사; 1694, 5~ 1696, 2월까지 제주 목사로 재임

1545년 林亨秀(임형수) 목사의 시에 나타난 이섭정이 1694년 이익태 목사의 지영록과 탐라십경도 조천관의 그림에 의거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기쁨도 잠시...

“게난 이섭정은 어디에 이시멍”이라는 첫 번째 질문에는 답이 되는데, “뭐 허는디 쓰던 거라?”는 두 번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동여지도를 그린 고산자 김정호처럼 궷물 정호도 전국을 누비다, 드디어 강화도에 「利涉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그 이섭정을 찾아 지금 강화로 출발합니다.

 

2. [강화도의 利涉亭]

강화도에서 이섭정은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단청의 아름다움이 바로 조천관의 이섭정을 보는 착각에 빠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利涉亭은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이롭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관문이었다. 옛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져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건립했다. 기문은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지었다. 현재의 모습은 1976년에 다시 지었다.
利涉亭은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이롭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관문이었다. 옛 진해루 옆에 있었는데 무너져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에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조선 태조 7년(1398)에 건립했다. 기문은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지었다. 현재의 모습은 1976년에 다시 지었다.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지은 記文에서 ‘利涉’의 뜻과 관련된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강화도의 ‘갑곶’은 원나라 군사들이 쫓아와서 말하기를 ‘갑옷만 쌓아도 건너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갑곶’이라 이름 하였고, 「利涉亭」이라 명명한 뜻은 “나는 그 물은 건너기 쉬운데 정자가 마침 나루터에 있기 때문에 利涉亭이라 이름하고...이 정자에 또한 기꺼이 기문을 짓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출처; 유교신문, 先賢들의 멋이 깃든 亭子이야기 54-

사진에서 「利涉亭은 고려 때 몽고와의 협상에서 우리 측이 이롭기를 염원하고 외교 사신들을 영접 환송하기 위해 지은 관문」이라고 설명한 것은 이섭정의 뜻이 아니라, 이섭정을 세우게 된 경위에 대하여 후대의 학자가 부연하여 설명한 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은 이섭정이라 명명한 뜻을 그가 지은 기문에서 “나는 그 물은 건너기 쉬운데 정자가 마침 나루터에 있기 때문에 利涉亭이라 이름 하였다.” 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3. [조천관 利涉亭]과 [강화도 利涉亭]의 연관성

우선 정자가 세워지는 것은 그 시대적 상황과 연계가 되고, 정자가 준공되면 그에 합당한 이름을 짓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먼저 利涉이라는 이름의 淵源(연원)은 무엇이고, 다음 시대적 상황인 고려말 몽고의 침략으로 시작된 대몽항쟁의 시대를 살펴보고, 마지막 지리적, 지형적으로 제주와 강화는 섬과 바다라는 같은 유사점이 있다는 측면에서 고찰해보겠습니다..

가. 첫째 ‘利涉’이라는 말은 주역에 자주 나오는 ‘利涉大川’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큰 바다나 강을 건너 앞으로 나아가면 이롭다’는 뜻입니다. 즉 물이나 강이 험난한 시련이나 역경이지만, ‘天道(천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그 험난한 시련을 헤쳐 나갈 수 있으니, 나아가면 이롭다’는 의미로 풀이 됩니다.(몽고하면 지금의 몽고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은 물론이고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지배하였던 원나라입니다. 또한 성리학을 국학으로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유사한 이야기가 경기도 ‘利川’이라는 지명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利川’이라는 지명의 태동은 93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지방호족인 서목(徐穆)의 도움으로 복하천을 무사히 건너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를 기념, ‘周易’의 ‘利涉大川’이란 괘에서 ‘利川’이라는 이름을 이 고장에 하사했다. -출처; 경기일보-

나. 두 번째 시대적 상황으로

① 고려(강화도 항전)는 1231년 몽고가 침공하자 1232년(고종 19년)에 수도를 江都로 옮기고 항전하다가 1270년(원종 11)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몽골의 간섭 아래에 들어갔으며, 이는 강화도로 천도한지 39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② 탐라는 고려조정이 몽고에 항복하자 이에 반기를 든 삼별초군이 1271년 제주에 상륙하여 항전을 벌이다. 2년 후인 1273년 항쟁이 진압되면서 원의 지배가 시작되었고, 1374년 최영이 목호의 난을 진압할 때까지 10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일제강점기 35년에 비교해도 정말 길고 긴 세월입니다.)

다, 세 번째 지리적으로 제주도와 강화도는 둘 다 섬이라는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데, 강화도는 고려조정이, 제주도는 몽고에 항복을 거부하고 고려조정에 반기를 든 삼별초군이 대몽항쟁 기지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형적으로도 [강화도의 利涉亭]은 갑곶나루[甲串津]에 [조천관의 利涉亭]은 조천관포[朝天舘浦]에 건립되어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방어하기 유리한 요충지(적이 침입하기 쉬운 要害地?)에 건립되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4. 「朝天舘 利涉亭」이 새롭게 단장하고 다시 태어납니다.

가. [강화도 利涉亭]은 고려조 몽고침략 당시 지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므로, 조선 태조 7년(1398)에 강화부사 이성(李晟)이 장소를 옮겨 새로이 건립하였다는 기록과,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이 지은 기문에 ‘利涉亭’이라고 이름을 붙인 뜻을 “나는 그 물은 건너기 쉬운데 정자가 마침 나루터에 있기 때문에 利涉亭이라 이름 하였다.” 라고 밝힌 기문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 [朝天舘 利涉亭]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남사록과 지영록 속에 利涉亭이라는 이름과 탐라십경도 조천관에 그려진 利涉亭이라는 정자 외에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지금부터는 사실과 허구를 섞어 새롭게 단장하고 선보이기 위한 글이라는 정도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① 첫째 지영록의 탐라십경도 조천관 편에 ‘성 밖 하륙하는 곳에 利涉亭이 있다.(원문; 城外下陸處有利涉亭) 라는 글에서 利涉亭을 지금의 배를 타고 내리는 대합실을 연상하여 봤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조천진성 둘레가 모두 바다로 하나의 섬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으나, 성 밖에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언제나 물이 빠지지 않고 수심이 깊어 배를 접안할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둘러보시면 이섭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는 조천포구가 육지로 가장 깊숙이 들어온 지점이며 수심 또한 가장 깊은 곳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만, 利涉亭이라는 글이 1545년 林亨秀 목사의 시에 처음 나타나는데 과연 당시에 지금의 여객터미널과 같은 용도의 정자가 지어졌겠느냐? 하는 점은 의혹으로 남습니다.

② 두 번째는 옛날 조천포구가 워낙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였던 곳으로, 戀北亭이 성 위에 세워져 북쪽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는 뜻으로 군신간의 충절을 의미하였다면, 이는 나라에서 녹을 먹는 지체 높은 목사, 관원, 양반들이 이용하는 공간이요.

利涉亭은 常民(상민)들이 사용하는 공간으로 성 밖에 세워져, 그저 소박하게 저 바다를 무사히 건너기만을 기원하며 명명하지 않았을까? 생각하여 봅니다. 물론 지체 높은 관원이나 양반나리도 겉으로는 충절이요, 대의명분을 내세웠겠지만, 대부분이 마음속으로는 오로지 ‘利涉大川!’하며, 어서 저 넓은바다를 건너서 한성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을까요?

※지금의 제주항과 조천포구를 연상하시면 글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즉 제주항은 당시 산지포로 사람들이 육지와 왕래하던 포구가 아니라, 조그만 어촌이었을 뿐입니다. 영주10경중 하나인 산포조어(山浦釣漁; 山地浦에서 작은 배를 타고 낚시하던 모습)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③세 번째는 국제적으로 시야를 넓혀 보겠습니다.

고려의 항복으로 탐라는 1273~ 1374년까지 10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 동안 탐라를 오가며, 또는 탐라에 정착하여 살아간 牧胡(목호)와 그 가족들이 육지와 가장 가까운 조천포구의 利涉亭에서 저 큰 바다를 바라보며 고향을 그리워하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면서도.... 단장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국제적으로 시야를 넓혀보겠습니다.

여몽연합군은 1273년 제주도로 이동한 삼별초를 완전히 진압하고 일본 정벌을 미리 준비해왔던 원나라는 제1차(1274년) 일본정벌을 감행하였으나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철수 합니다. 원나라는 1차 일본정벌에서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다시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이라는 관부를 두고, 탐라에는 목마장을 두어 다시 정벌을 준비합니다.

'궷물' 김정호ⓒ헤드라인제주
'궷물' 김정호 ⓒ헤드라인제주

이후 제2차(1281년) 일본정벌을 단행하였으나, 태풍으로 군선 대부분이 난파되고 질병으로 정벌은 실패로 끝이 났지만, 당시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하는데 가장 바랐던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利涉大川(저 큰 바다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의 뜻으로 利涉亭을 세우고, 일본정벌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1·2차 모두 여몽연합군이 고려에서 출발한 곳은 탐라가 아니라 합포(合浦; 마산)였네요.

최근에(2019년) 조선 실학자가 직접 보고 그린 '거북선 그림'을 찾았다는데, 탐라십경도 조천관 원본이나, 利涉亭에 대한 고증자료도 발견돼서 역사적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2020년 2월 궷물 정호가 利涉亭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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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룡 2020-02-07 14:29:13 | 112.***.***.75
강창룡입니다. 제가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에 관심이 많아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 「조천관(朝天舘)」을 번역한 내용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조천관(朝天舘)」, 사면(四面)을 둘러싼 바다에서 밀물이 나가면 한 방향만이 육지와 연결되므로 들어 올리는 다리[擧橋]를 만들어 성문(城門)과 통하게 했다. 이곳에는 높고 낮은 모든 관리[大小人員]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널 때에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다. 그리하여 방호소(防護所)를 설치하고 조방장(助防將)을 두었다.

강창룡 2020-02-07 14:29:51 | 112.***.***.75
성의 주위로는 428자이며 높이가 9자이고 정군(丁軍)은 241명이다. 봉수(烽燧)가 1개이며 연대(煙臺)는 2개이고 배가 정박하는 포구(船泊浦)의 3곳을 맡아서 관할한다. 성 아래 포구에 돌로 쌓은 보(石埭) 가운데에서 수문(水門)을 열면 바다를 오가는 뱃길이다. 평상시에는 그 안에 배를 두며 성 밖의 배를 내리는 곳에는 이섭정(利涉亭)이 있다. 갯마을(浦村)에는 수백 집이 귤나무의 수풀(橘林) 가운데에 즐비하니 배들은 포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관방의 지세가 뛰어난 것으로는 9진(九鎭)에서 첫째다.

※ 석보(石埭)는 왕래하는 선박에서 통행세를 받기 위하여 돌로 쌓은 보(洑)이다. ※

강창룡 2020-02-07 15:02:04 | 112.***.***.75
강창룡입니다. 제에게는 1724년에서 1754년 사이에 제작한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 「조천관(朝天舘)」(필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이 소개한 자료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제주십경(濟州十景)』 화첩(畵帖) 중에 「조천관(朝天舘)」에 나타난 이섭정(利涉亭)입니다. 이 자료의 필름도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익태(李益泰) 제주목사의 1696년에 제작한 『탐라십경도(耽羅十景圖)』의 원본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