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수의 꽁트](6)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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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수의 꽁트](6)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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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서 기억력이 떨어지니 별별 난처한 일이 다 생기는 요즘이다. 대학교수는 책을 많이 보니까 머릿속에 기억창고가 항상 차고 넘쳐서 일상적인 잡사들은 잘 잊어버리게 마련이라는 어느 동료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지리학회에 참가하러 서울로 갈 때 내 연구실에 있는 생물지리학 책 한 권을 집에 가져가서 아내에게 전하기로 한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사달을 내고 만 것이다.

나의 서울 체재 5일 동안 혼자 집에 있게 된 아내는 나의 권고에 따라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를 읽기로 했는데, 내가 깜빡하는 통에 아내가 직접 우리 대학에 찾아가서 나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감에 따라서 생긴 사고였다. 아내는 내가 서울로 떠나는 날 저녁에 바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가 말한 그 책이 나의 연구실 어디에 놓여있는지 물어왔고, 나는 아내가 알아듣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때까지만해도 그런 일 때문에 우리 부부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싹 틀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나는 내가 말한 이 책을 아내가 얼마나 즐겨 읽어줄 것인지, 생물지리학이라는 야심 찬 학문이 이렇게 흥미진진하고 거창한 테마를 개척하고 있다는 나의 말에 공감해 줄는지, 이런 것만 걱정하고 있었다. 다이아몬드의 이 저서는, 인류역사의 중추 세력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출현할 수밖에 없었음을 지리환경적인 조건으로 설명하였는데, 우리 지리학과 학생들에게 학문적 자부심을 심어주는 데에는 꼭 필요한, 말하자면 우리 학과 학생들의 필독서였다.

세상 여자들은 역사나 지리 같이 끝없이 광범위한 시공간을 다루는 학문에 대해 싫증을 느끼기 때문에 나도 그동안 아내로부터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이번에 참가하는 **학회만 해도 논문 발표가 끝난 다음에 고적지 탐방이라는 이름으로 이틀간이나 명승지 여행을 하는데도 전문가들의 학술행사이기 때문에 부부동반이 되지 않아 아내로부터 가시돋힌 투정을 들어야 했다.

아내가 나의 부재중에 나의 연구실에 들어간 사실만으로야 무슨 탈이 났겠는가. 사달이 크게 난 것은 나의 부주의로 인하여 아내가 보아서는 절대로 안될 물건이 나의 연구실 책상 위에 버젓이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학회 참석에 대비하여 관련 논문 목록이나 학회회원 명단 등을 챙기다가 서랍속에 있던 이 비장의 물건을 꺼내놓고서는 그대로 나와버렸던 모양이다.

교수라는 작자가 포르노 뭉치를 연구실에 묻어두고서는 뭘 하려고 했는지, 의아해했을 아내는 나에 대해 얼마나 실망했을까. 나는 예전에 학회 참석차 영국여행을 갔을 때 모 대학 교문 앞 서점의 핫코너(hot corner)에서 포르노사진 한 갑을 구입해 와서 나의 연구실 책상 서랍 안에다 비장해 두었던 것이다. 겉모양은 빨간 색 두껑을 한 무슨 트럼프 카드박스 같이 보였기 때문에 그것을 열어보기 전에는 발각될 리도 없겠다 싶었다.

남녀간의 정사 장면은 아니었지만, 젊은 여자들의 알몸 사진들이 여러 가지 포즈로 찍힌 것이었는데, 벌거벗은 여체의 음부와 체모까지도 풍성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순진하기 이를데없는 아내가 봤다면 정말 기절초풍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었다. 이런 물건을 갖고 영국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나는 보안조치에 만전을 기하였다. 아내가 본다면 얼마나 놀랄 것인지 짐작이 갔으므로 나는 이 물건이 들어있는 손가방을 아내의 눈을 피해 깜쪽같이 연구실에 들여놓은 다음에는 책상 서랍 속에 간수해 두고서 간혹 생각날 때만 들춰내어 눈요기를 했던 것이다.

서울에서 학회 일정을 모두 마치고 **공항에 내린 시간이 오후 이른 시간이었으므로 나는 집에 들르기 전에 학교 연구실로 먼저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행장을 풀기도 전에 실내 풍경이 확 달라진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평소에는 연구실 안에 잡동사니 물건들이 되는대로 널려있는 뒤죽박죽 상태였고 실내 바닥이나 구석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묻혀 있어서 누가 보면 눈이 어지러울 정도였는데 이제는 말끔히 정돈되고 깨끗이 닦여져 있었던 것이다. 아내가 수고를 한 덕분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연구실 안에 청결과 미관이 엉망인 것을 본 아내가 가만히 있지를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실내의 정리정돈과 청소를 철저하게 하는 동안 책상 위에 놓인 포르노 뭉치의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눈이 가 닿았을 것이다. 내가 깜빡 주의력을 잃고서 책상 서랍 속에 있던 빨간 색 두껑의 포르노 사진 박스를 책상 위에 꺼내놓은 채로 연구실을 나가버린 것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포르노 사진 뭉치가 그냥 흔히 있는 책자 안에만 있었더라도 아내의 눈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 색 박스가 책상 위에서도 한쪽 구석에 있지 않고 제일 앞쪽 가장자리에 놓여있는 것은 아내의 의도적인 자기표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자기가 이 위험물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했음을 내가 알아보도록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날 착잡한 심정으로 집에 들어간 나는 내가 저지른 죄과의 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아내는 나를 보고서도 아무 말이 없었지만, 화가 치미는 표정과 어이없다는 눈총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내가 무슨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 대한 준엄한 질책의 뜻은 곳곳에 나타나고 있었다.

서재에 들어간 나는 내가 쓸 침구가 그곳에 옮겨져 있음을 알았다. 부부가 같은 방에 자던 오랜 습관이 종료됨을 나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저녁 식사는 내가 먹도록 부엌에서 차려진 음식을 혼자서 먹어야 했다. 취침 시간이 가까워 오자 아내의 방은 안에서 문이 잠겨졌다. 나는 갑자기 들이닥친 아내의 긴급조치를 그냥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의 단호한 성격과 순수결벽주의 소신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나홀로 식사를 마치고 출근하여 연구실로 들어간 나는 전날에는 알지 못했던 상황을 뒤늦게 알아보고 또 한번 놀랐다. 아내가 집으로 가져가기로 되었던 다이아몬드의 명저 『총, 균, 쇠』가 아직 나의 연구실 안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 책이 놓인 위치가 책상 위에서부터 책상 옆 서가의 한 구석으로 이동해 있을 뿐이었다.

아내는 나의 부정한 행실의 실상을 보고 대경실색한 나머지 지리학도들의 필독서고 뭐고 안중에서 사라졌던 모양이었다. 의자에 털썩 몸을 내려놓은 나는 아내가 지금 어떤 심중에 있을지 곰곰이 상상해 보았다. 아내의 강직한 결벽주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같은 고집은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내가 소장한 포르노 사진이 그렇게 난잡한 것인지 실감해 보기 위해 빨간 색 트럼프 박스를 다시 열어보았다. 내가 유럽에서 보았던 포르노 작품들의 면면에 비한다면 그리 심한 정도가 아니다 싶기는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따질 성질이 아닐 것이다. 당사자가 추하다고 보면 추한 것이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어떻게 논리적인 증명을 할 것이며, 눈에 보이는 무슨 물증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아내는 여지껏 자신의 벌거벗은 알몸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침실에서 방사를 예사롭게 치르는 자기 남편에게도 자신의 은밀한 곳 음부만은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곳은 가히 신성불가침의 거룩한 성역이었다.

어두운 침실에서 애무까지 할 수 있다가도 불을 켜는 순간 성역이 되어 시각의 대상은 될 수 없었다. 창피를 무릅쓰고 몇 번 사정을 해봤지만, 어떻게 사람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무안만 주었다. 백합꽃처럼 정숙하고 장미꽃처럼 미모인 아내의 작은 고집 하나를 내가 그냥 받아주면 될 일인데 그런 문제 가지고 언제까지 티격태격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부질없는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다이아몬드의 저서에 다시 시선이 꽂혔다. 이 책의 내용에 따르면, 유럽과 아시아가 세계역사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양대 대륙이 같은 위도(緯度)권역에서 지리적으로 접속된 관계로 오랫동안 두 문명권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인데, 지금 우리 부부가 겪고있는 갈등과 불화는 오래된 유럽권 문화의 전통을 일부 아시아인들이 아직도 수용하지 못한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나는 아내에게 어떤 말을 해야 이런 사정을 납득시킬 수가 있을까. 영국에서는 유명 대학의 교문 앞 서점, 학생들이 자유자재로 출입하는 일반 서점에서 이런 물건을 사고팔고 하더라고 말하면 납득을 할까. 영국이라는 나라는 점잖고 예의바른 국민성으로 알아주는 신사의 나라이고,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 종목 대부분이 영국에서 유래했을 정도로 앞서가는 선진국이 영국이라는 말을 하면 뭐를 알아들을까.

그날 하루 종일 속앓이를 하던 나는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총총한 마음이 되었다. 어떤 방향으로든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택할 결론은 두 가지 방향으로 있을 것 같았다. 하나는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던 바를 솔직히 털어놓는 방향의 것이었다. 이 정도의 포르노 작품은 불경스럽거나 인륜에 반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와 생명의 신비가 응축된 것이 이곳이며, 남녀간 사랑의 오묘함이 깃들어있는 곳이 여기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아름다운 그림일 수도 있다, 그것을 봤다고 해서 누가 아프거나 건강을 해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런 말을 들으면 아내는 어떻게 응수할까, 나는 아내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다른 하나 남은 방향으로 결론을 짓기로 했다. 나의 소견, 나의 주장을 말하지는 말자. 해봤자 화 난 사람의 화를 더 들쑤시는 격일 뿐이다. 자신의 정결한 몸이 남자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거나 관음증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아내의 도도한 자존심에 거슬렸을 것이다.

아내 앞에 양손 들고 나타나서 용서를 구하자. 이런 물건을 사온 것은 여행 중에 잘 빠져드는 한 순간의 객기 탓이었다, 동료교수들의 부추김이 없었으면 당신의 단호한 성질을 잘 아는 내가 이런 물건을 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이 박스를 몇 번 열어보지도 않았다. 당신 앞에서 이 물건을 깨끗이 소각처분할 것이고 앞으로는 이런 물건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니 이번만은 그냥 못 본 척해 주기 바란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두 손 들고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에게 어떻게 가혹한 벌을 내릴 수 있겠는가. 아내의 성화를 잠 재우기 위해 이런 궁상맞은 변명을 하면 나의 자존심이 좀 상하기는 하겠지만, 그 결과로 아내가 나를 다시 사랑해 주기만 한다면 그것이 내가 택할 길일 것이다.

나는 겨우 도달한 나의 결론이 결국 최선의 것임을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연구실을 나섰다. 아내의 잘 생긴 얼굴이 불현 듯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고운 얼굴에 일그러진 표정이 떠올라서는 안될 일이라는 생각만을 붙잡기로 했다. <양영수 소설가>

<양영수의 꽁트>는...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소설가 양영수. ⓒ헤드라인제주

바야흐로 영상시대라고 한다. 이야기문학을 감상하는 것도 문자매체보다 영상매체를 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영상매체 속에서는 금방금방 장면이 바뀌는 스토리라인을 사람이 따라잡아야하기 때문에 깊이있는 사색과 음미가 잘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사람 마음이 주체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생체리듬과 심리적인 템포에 따라서 메시지 내용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에는 문자매체를 이용하는 독서가 좋은 방법이다.

꽁트 연재를 통해 필자가 바라는 희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양영수 작가 

제주 태생의 소설가.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 제주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교수 정년퇴임.

그 동안 내놓은 작품들로는 단편집 '마당 넓은 기와집' (2008년), 장편소설 '불 타는 섬' (2014년,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작), '복면의 세월'(2019)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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