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농업, 경제작물로의 전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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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농업, 경제작물로의 전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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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31)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광복 후의 혼란은 농업생산을 극히 위축시키기에 이르렀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농지개혁법 시행과 함께 양곡수납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농업기술보급의 산실 농촌진흥청은 1906년 설립된 권업모범장을 기원으로 하며. 1929년 농사시험장, 해방 후 중앙농사시험장, 1947년 농사개량원, 1949년 농업기술원, 1957년 농사원, 1962년 농사원, 농림부 지역사회국, 농림부 훈련원을 통합해 농촌진흥청이 발족되었다.

왼쪽부터 농촌진흥청 옛 청사(수원), 농촌진흥청 신 청사(전주)
왼쪽부터 농촌진흥청 옛 청사(수원), 농촌진흥청 신 청사(전주)

휴전을 전후하여 농업정책은 증산에 집중되어 토지개량사업의 추진, 종자갱신사업의 실시, 미맥증산 5개년계획(1953∼1957)의 실시 등 전재복구와 아울러 식량수급균형을 실현시키려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1953년도 하반기부터는 그 해의 미곡풍작과 아울러 산업생산이 소강상태로 되돌아가고 각종 외국원조가 활발히 주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농업증산 5개년계획은 여건의 미비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58년에 다시 식량증산 5개년계획을 수립, 농토개발에 의한 최대한의 경지면적확보를 기도하고 관개개선사업, 농업교도사업, 종자개선사업 등을 적극 실시함과 아울러 자급비료의 시설을 늘리는 등으로 단위면적당수확량의 증대를 꾀하려 하였다. 1955년 이후에도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연평균 30만∼40만 톤(국내미곡생산량의 약 10%)을 들여왔다. 1950년대의 농업기술계와 농학계의 움직임을 보면, 농사원(農事院) 기구하에 중앙과 각 도의 농사시험장, 원예시험장 등 연구소의 활동과 10여 개 농과대학의 운영을 볼 수 있었고, 연구발표도 점차 활발하여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학술 겸 기술에 관한 잡지도 발간되고 농업기술에 관한 단행본도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비료의 시용량도 급증하여 충주와 나주의 비료공장 설치를 서두르게 하였으며, 농약의 수입이 활발히 추진되어 수많은 새로운 농약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예면에서의 육종 및 종묘사업은 눈부신 발전을 보아 국내 채소의 자족자급을 이룩하게 되었으며 과수재배도 활발하였다. 농업유통과 관련하여 1961년 8월 농협중앙회를 비롯하여 8개 도지부, 140개 시군조합, 101개 특수조합, 2만1042개 이동조합(里洞組合) 등의 3단계 계통조직체제를 마침내 갖추고 발족을 보게 되었으며 1962년 4월 농촌진흥청이 발족되었으며. 농촌진흥청 발족과 함께 각 도에는 도지사 소속 도 농촌진흥원도 설치됐다.

1962년을 기점으로 하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가운데 농업정책의 기본목표는 농업의 근대화와 농가소득의 향상 및 식량증산을 통한 자급자족체제의 확립에 두었다. 이후 농지정책에 있어서는 경지정리와 농지확장 및 수리사업(특히 전천후농업용수개발)으로 농업증산과 영농기계화의 기반조성에 힘썼으며, 생산정책에서는 비료·농약·농기구 등의 자재를 적기에 염가로 공급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특히, 비료는 자급달성을 위하여 비료공장 증설에 주력하고 3요소 균형시비와 토양산성화 방지에도 힘썼다. 이와 같은 중농 또는 농공병진의 정책하에서 1960년대의 학계와 기술계는 농업면에서도 활발히 움직였다. 농촌진흥청 산하의 각 연구소·시험장의 연구는 지도사업과 함께 더욱 활발해졌고, 각 농과대학의 연구실과 그 부설연구소의 학적 활동도 점차 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이루어진 많은 농학관계 업적 중 특기할 것은 우선 초기에 노후화답 및 추락현상 그리고 낮은 생산지 개략조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여 성과가 좋았으며, 벼품종개량을 위한 육종연구가 강력히 추진되었다.

농촌진흥청의 토양조사사업은 1964년에 시작하여 5년간에 걸쳐 그 1차 작업을 끝내었는데 대형 9권의 『한국개략토양도(韓國槪略土壤圖)』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 사업은 장기계획으로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현재 30여권의 정밀토양도가 간행되었다. 이와 아울러 토양비옥도조사사업도 이루어졌다.

경제작물재배의 주산단지조성이 강조되었고, 잠업 분야에서도 상목육성과 잡종강세를 이용한 우수잠품종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1967년에 시작된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도 농정의 기본목표를 식량증산과 농가소득향상에 두어 여러 가지 제도적 조처로서의 법이 마련되고, 농림수산물의 저장처리 및 가공방법을 개발함으로써 농어민의 소득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농어촌개발공사(農漁村開發公社)의 창립을 보았다.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1972년부터 농정은 또다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즉, 중화학공업의 건설, 수출의 획기적 증대와 함께 농어촌의 혁신적 개발을 목표로 하여 농촌의 중점개발을 위한 각종 시책이 새마을운동을 중심으로 활발히 추진되었다. 지붕개량·농촌전화·농용수개발·생산기반확충·협동생산·새마을공장건설 등과 아울러 주곡증산에 새로운 중점이 주어지게 되었고, 특히 세계식량파동을 계기로 식량자급을 위한 인식과 노력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다. 다수확품종의 보급이 확대됨에 따라 증산기술이 더욱 향상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할 비료·농약·농기계 등 영농자재와 자금지원도 집중 투입되었다.

과수의 재배도 1960년대에 와서 본격적인 연구와 시험이 시작되어 사과, 배, 포도, 복숭아, 감, 귤 등의 신품종도입과 시험·보급이 활발하였는데, 특히 온주밀감의 재배보급과 왜성사과의 재배는 주목할 만하다. 채소원예에서는 작물의 계절성을 극복하여 일년내내 생산할 수 있는 주년생산방법을 확립, 도시 근교의 놀라운 원예수준을 이룩했다.

인구의 증가율도 커서 1980년대 들어 4천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인구와 주곡생산량을 비교해보면 쌀·보리의 자급은 달성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편 밀, 옥수수, 콩 등의 외곡도입이 늘어나 전체식량자급도로서는 50%(1984)를 밑돌고 있는 상태였다.

육류(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의 소비와 우유 및 유제품 소비의 증가는 축산 발전과 연결된다. 육류와 동물성 식품의 소비증가에 비해 쌀과 보리의 소비는 해마다 줄어들어 쌀은 14년 동안(1971∼1984)에 6.8%, 보리는 80%의 소비감소를 보았다. 즉, 1975년까지 1100만∼1200만 석에 이르던 보리생산이 점차 줄어들어 1985년에는 280만 석으로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주곡소비양상의 변화와 아울러 채소와 과일의 소비는 1970년에 비하여 약 2배로 증가함으로써 크게 변하였다. 벼재배의 경우 사상 최초의 우수품종이었던 통일계가 1978년을 고비로 병충해에 약해졌다는 것이 증명되어 1979년 이후로는 벼병충해방제에 초점을 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과 1995년 국제무역기구(WTO)의 출범으로 국제경쟁력이 취약하였던 우리 농업, 특히 쌀생산에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즉, 쌀시장개방압력이 드세져 벼재배면적의 감소가 해마다 눈에 띠고 있다. 1996년 현재의 식량작업도를 살펴보면 쌀 92.3%, 보리 59.0%, 밀 0.67%. 두류 9.7%로 총식량작업도는 25.6%로 1980년대의 반에 불과하다. 즉, 쌀만은 자급에 가까울 만큼 생산하고 있는데 이것마저 시장개방으로 위축될 염려가 생기고 있다.

21세기를 향한 한국농업의 과제를 생각할 때 우선 고품질 다수확성 품종 육성를 위해 작물, 가축의 재배, 사양기술을 첨단기법으로 향상시키고 생산기반의 정비에 힘을 쓸 것이며, 지대(地代)와 노임의 고가를 고려해 농촌마을의 경영체가 운영될 필요가 있다. 또 농촌소득원을 증가시키기 위해 농외소득을 늘리고 생산비 절감을 위한 기계화와 시설을 더욱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유통구조개선은 농산물개방에 따라 외국 농산물의 대량유입에 대항하는데도 큰 몫을 할 것이다. 새 시대에 있어 농업정보망의 충실화 그리고 영농후계자 양성과 농촌복지(자녀교육, 의료, 노후생계 등)가 농촌공동화(農村空洞化)를 방지한데 더욱 필요하다.

참고자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특별자치도 농업기술원, <제주농촌진흥 60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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