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던 연북정(戀北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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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던 연북정(戀北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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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궷물' 정호가 조천을 그리며](3) 연북정(戀北亭)에 대하여

(1) 「조천관 중창기」 1591년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의 記文으로

선조 23년(1590)에 이옥(李沃) 목사가 조천진· 조천관을 중창한 업적을 상세하게 기술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이후 조천관·연북정에 대한 모든 글의 바탕이 된 記文입니다.

조천관 중창기 중에서 원문; 「城子則退築東北 上安譙樓 其名雙碧」 「성곽은 뒤로 물려 쌓고 동북쪽에 門樓를 세워 雙碧이라 하였다.」 라고 하였으며, ‘戀北’에 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즉, 1590년 이옥 목사가 조천관(朝天舘)을 중창할 때에 “성곽을 동북쪽으로 넓히면서 위에 초루를 세우고 그 이름을 雙碧이라” 했으니, 譙樓는 亭子가 아니라 門樓이므로, 雙碧亭이 아니고, ‘雙碧樓’이고 옮겨진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세워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敎授는 당시 제주향교의 직책입니다.

(2) 「南槎錄」 1601년 안무어사 김상헌의 일기체 형식의 글로, 2009년 제주문화원에서 번역본 「南槎錄 譯註」를 발간하였습니다.

「南槎錄 譯註」 1601년 10월 12일자에 (전략) “조천관(朝天館)으로 향해 연북정(戀北亭)에 앉았다. 정자(亭子)의 이름이 옛 편액은 쌍벽(雙碧)인데 목사(牧使) 이옥(李沃) 때에 세운 것이다. 전(前)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중수(重修)하여 예전의 규모를 더욱 늘려 편액을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하였습니다..

※ 1601년 김상헌의 「南槎錄」에 「연북정(戀北亭)」이라는 편액 이름이 확인되고, 전임 성윤문 목사(선조 32년 1599년)가 쌍벽(雙碧)을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3) 「탐라지」 목사 이원진이 효종 4년(1653년) 제주의 실상을 기록한 읍지로 방호소 편에 「朝天所 城中有 朝天舘廚廐軍器庫 東城上有雙碧樓戀北亭」朝天所는 성안에 조천관(朝天舘)과 부엌, 마굿간, 군기고가 있으며, 동성(東城) 위에는 쌍벽루(雙碧樓)와 연북정(戀北亭)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 朝天所는 朝天鎭를 뜻합니다

(4) 이익태 목사의 17세기 후반 탐라십경도 朝天舘 화첩에는 성위에 戀北亭이, 성 안의 가운데에는 ‘朝天舘’이 그려져 있습니다.

「탐라순력도」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화공 김남길을 시켜 제작한 화첩에는 성안의 건물로는 軍器(庫)가 성위에 戀北亭이 그려져 있습니다.

(5) 「增補耽羅誌」 영조41년(1765)에 윤시동 목사가 제주목의 서원들에게 편집하게 한 읍지로 2016년 뒤늦게 제주문화원에서 번역본 「國譯 增補耽羅誌」으로 발간하였습니다.

“(조천진에) 「조천관이 있다. 연북정은 이옥 목사가 성 안으로 옮겨 들여놓았다. 예전에 쌍벽정이라고 편액을 했었는데 성윤문 목사가 중수하고 편액을 연북정으로 고쳤다.”라고 하였습니다.

(6) 「탐라지초본」 1841년 이원조 목사가 草稿(초고)한 읍지로 2007년 제주교육박물관에서 번역본 탐라지초본 上이 발간되었습니다.

제가 가장 의혹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연북정은 곧 객사이다(戀北亭卽客舍)」라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 부분은 지면을 별도로 할애하여 제Ⅳ장에서 다루겠습니다.

(7) 「연북정(戀北亭)」 안내판

연북정(戀北亭)」 안내판 한글 부분에 (전략) 「문헌 기록에 의하면, 1590년(선조23) 당시의 조천관을 중창하여 쌍벽정(雙璧亭)이라 칭하였다가 1599년(선조32)에 다시 건물을 고쳐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하였다.」 하였습니다. (이하 생략)

☞ 정리에 들어가겠습니다.

연북정은 조천리 바닷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입니다.

1971년 제주도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3년 보수한 건물인데, 보수 당시 ‘용(龍)/ 가경이십오년 경진이월 십오일 진시 입주상량 [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辰時入柱上樑]/호(虎)’라 한 명문(銘文)이 발견되었습니다.

가경(嘉慶) 25년, 즉 순조 20년(1820)에 마지막으로 보수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로부터 조천포구는 화북포와 더불어 관원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이었으며 순풍을 기다리는 候風所이기도 했습니다. 연북정이 세워진 이후 수많은 목사, 관리, 유배인들이 이 정자에서 북녘에 계신 임금을 그리워하고 순풍이 불어 무사 항해를 기원하였을 것입니다.

※嘉慶 二十五年 庚辰 二月十五日

가경(嘉慶) 25년= (1820년, 청나라 仁宗/ 조선 순조 20)

연호 嘉慶= 紀年 청나라 仁宗(嘉慶帝)= 육십갑자로 庚辰年입니다.

▶ 다음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바르게 고쳐져야 합니다.

Ⅲ-(2) 南槎錄 譯註(下) 주석 21) 이옥(李沃): “성 밖에 있던 객사를 동성 위쪽으로 이설하여 쌍벽정(雙碧亭)이라 개편(改扁)하였다.”

이때의 교수 곽기수(郭期壽)의 「記文」이 현재 전하고 있다. 라고 하였는데 원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원문; [朝天之爲舘 實賊路之要衝 使命之所舍(중략)

城子則退築東北 上安譙樓 其名雙碧 屋宇則中置廳事(이하 생략)]

“조천에 舘을 둔 것은 실로 賊이 왕래하는 요충지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성곽은 뒤로 물려 쌓고 동북쪽에 門樓를 세워 雙碧이라 하였고, 건물들은 중앙에 廳事(官衙)를 두었다.”라고 하였지, 객사를 이설하고 쌍벽정으로 개편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10년 후인 1599(선조 32)에는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조천성을 중수할 때 쌍벽정을 연북정(戀北亭)으로 개편하여 현재까지 전한다.” 하였는데, 성윤문 목사가 □□을 중수했는지? 원문을 찾아보았습니다.

「증보탐라지」의 원문 [有朝天舘戀北亭 牧師李沃時 移入城內 舊扁雙碧 牧師成允文重修 改扁戀北] 이고

「탐라지초본」의 원문[宣廟庚寅 牧使李沃 移建于東城上扁以雙碧己亥 成允文重修 改扁曰戀北]입니다.

증보탐라지, 탐라지초본 2편의 원문에 성윤문 목사가 중수한 것은 조천성이 아니라 雙碧(쌍벽)입니다. 즉, 1590년 이옥 목사 당시에는 현판이 쌍벽정이 아니라 ‘雙碧=雙碧樓’이고, 10년 후인 1599년(선조 32)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중수하며 고친 편액도 연북정이 아니라 ‘戀北=戀北樓’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현전하는 기록 중에 가장 오래된 1590년 이옥 목사가 조천관을 중창할 당시에 교수 곽기수의 「조천관기」 記文에 「성곽은 뒤로 물려 쌓고 동북쪽에 譙樓(=門樓)를 세워 雙碧」이라 하였으니 雙碧은 ‘雙碧樓’이고, 10년 후 성윤문 목사는 ‘雙碧樓’를 중수하여 편액을 ‘戀北’으로 고쳤으니, 그 전신인 ‘雙碧樓’를 이어서 '戀北樓'가 되는 것입니다.

Ⅲ-(5) 「國譯 增補耽羅誌」의 고딕체 부분 “(조천진에) 조천관이 있다. 연북정은 이옥 목사가 성 안으로 옮겨 들여놓았다. 예전에 쌍벽정이라고 편액을 했었는데 성윤문 목사가 중수하고 편액을 연북정으로 고쳤다.” 라고 하였는데, 지면 관계상 「“(조천진에) 조천관이 있다. 연북정은 이옥 목사가 성 안으로 옮겨 들여놓았다.」 는 부분은 논외로 하고,

‘예전에 쌍벽정이라고 편액을 했었는데 성윤문 목사가 중수하고 편액을 연북정으로 고쳤다.’ 는 부분은 Ⅲ-(2)에서 설명한 「증보탐라지」의 원문과 같으므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Ⅲ-(7) 「연북정(戀北亭)」 안내판 한글 부분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1590년(선조23) 당시의 조천관을 중창하여 쌍벽정(雙璧亭)이라 칭하였다가 1599년(선조32)에 다시 건물을 고쳐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조속히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위 Ⅲ-(2), 바르게 고쳐야 할 내용 참조)

또한 한문 글자도 ‘雙璧’이 아니라 ‘雙碧’입니다.

많은 블로그와 카페 등에 “쌍벽(雙璧)은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본래의 뜻을 살려 시적으로 읊는다면 “雙碧樓에 오르니 (한라)산도 푸르고 바닷물도 푸르구나!” (동어반복을 피하고 싶다면 “산은 푸르고 물은 파랗구나!” 정도입니다.) 그래서 구슬 ‘璧’이 아니고, 푸를 ‘碧’자입니다. 문화재 안내판이 잘못된 내용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되돌릴 수 없는 이름 戀北亭(연북정)

1601년의 김상헌의 남사록,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 이후 편찬된 다수의 地誌와 탐라순력도 조천조점에 戀北亭으로 기록되고 그려져 전해왔습니다. 즉, 되돌릴 수 없는 역사적 이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성윤문 목사가 중수하였다는 모든 원문에는 「舊扁雙碧 牧師成允文重修 改扁戀北」 「예전(이옥 목사)에는 편액을 쌍벽이라 하였는데 목사 성윤문이 중수하여 편액을 연북이라고 하였다.」 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임 성윤문 목사의 업적 또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후임 목사가 임의로 고치지 않은 것이라고 감히 추정합니다. 즉 문헌에 충실히 따른다면 ‘이옥 목사는 쌍벽루라고 편액을 했고, 성윤문 목사는 중수하며 편액을 연북루로 고친 것이지, 연북정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느 시대 누가 「연북정」으로 부르기 시작하였을까요? 명망 있는 학자 또는 향토사학자의 역할을 기대해봅니다.

<부산향토문화연구회 카페>에 실린 글입니다.

「객사로 쓰인 연북정, 임금이 계신 북쪽을 연모한다면 다른 곳과 잇는 제주도 최고의 길목이란 뜻으로 판단된다. 객사라면 '관'으로 이름을 지은 곳을 봤는데 이곳은 '정'으로 이름을 지었다.」 라고 방문 후기를 올려놨습니다.

이 분들은 답사 현장에서 바로, 다른 곳에서는 ‘관(館)’을 객사라 하였는데, 이곳에서는 ‘정(亭)’을 객사라고 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게 향토사가 후손들에게 바르게 전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조천리민 여러분! 남의 쓴 글을 인용하기 보다는 ‘館民’으로써 자긍심을 가지고 ‘민족자존의 고장’ 朝天을 다시 발전시켜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궷물' 김정호 ⓒ헤드라인제주
'궷물' 김정호 ⓒ헤드라인제주

<세 살짜리도 다 아는 이야기> 블로그에 올려진 글입니다.

「연북정! 정자의 이름과는 달리 그 모양은 마치 성곽이나 망루를 닮았다. 높은 축대의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러싸여 있다. 이곳의 모양과 크기가 甕城(옹성)과 비슷한 것이 연북정은 아무래도 망루의 용도로 지어졌을 것 같았다.」 정말! 세 살짜리도 다 아는 이야기를 저는 미혹하여 이렇게 길게 써내려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편에는 'Ⅳ. 되돌릴 수 없는 역사와 바로 잡을 수 있는 사실'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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