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서로 보는 조선후기의 농업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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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서로 보는 조선후기의 농업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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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23) 역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19세기 중엽을 넘어서면서부터 서양문물이 한반도의 농업기술에도 영향을 끼쳤다. 1884년(고종 21)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과 농상공사(農桑公司)의 설치를 비롯하여 미국의 새로운 농기계류의 도입, 외국농작물 종묘의 주문, 외국 가축의 구입 등 한때 활발한 정부의 움직임이 있었다. 1884년 안종수(安宗洙)의 농정신편(農政新編)과 이우규(李祐珪)의 잠상촬요(蠶桑撮要), 1886년 정병하(鄭秉夏)의 농정촬요(農政撮要) 등 신 서적이 출판되기도 하였지만, 이 서적들은 보급의 행운을 보지 못하였다.

우선 축산분야를 먼저 살펴보면 당시의 축산은 그 대상이 소, 말, 닭, 염소 등이 주종이었으나 그 가운데 한우(韓牛)는 사육을 목적으로 하는 역축(役畜)으로 우수하여 외국에까지 알려졌으며, 한때는 농가 5∼10호마다 한 필의 경우(耕牛)를 소유하였고, 일본과 러시아로의 수출도 활발하여 수출 두수가 1만 3000두에 이르렀다. 한우는 거친 먹이도 잘 먹으며 유순하면서도 쟁기갈이, 두엄의 생산, 운반용 그리고 식용에 아주 긴하게 쓰였다. 말은 비록 체구가 작으나 운반용이나 전용(戰用), 공용(貢用) 등으로 활용되었다. 돼지, 닭, 염소 등은 육용(肉用)이나 난용(卵用)으로 재래종이 농가의 자급 정도로 사육되고 있었다.

양잠업은 우리나라의 토양이 뽕나무재배에 적당하고 기후로는 5, 6월의 건조가 누에치기에 알맞아 예로부터 성행되었으나, 기술적인 진전이 별로 없는 것은 부녀자의 전업으로 맡긴 결과 개량의 연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국의 뽕밭은 751정보, 양잠호수는 6만 8500여 호였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농업에 관심을 가졌던 주요 분야는 식량확보를 위한 벼농사와 일본방적공업의 원료획득을 목표로 한 목화재배, 그리고 기업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이 있었던 과수재배의 세 가지였다.

'이유구의 잠상촬요'(왼쪽),  농진청 전신 권업모범장 모습
'이유구의 잠상촬요'(왼쪽), 농진청 전신 권업모범장 모습

벼재배에 있어서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1천여 종이나 되는 많은 벼 재래품종들은 일본에서 도입된 품종을 강력하게 장려함에 따라 재배면적이 점차 줄어들고 쇠퇴하게 되었다. 목화의 작황도 1904년 일본을 통하여 미국산 종자를 수입하여 순화(馴化)에 힘쓰는 한편 재래품종에서 양종도 선발하여 증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고려 말에 처음 들여온 목화가 임진왜란 전까지 융성기를 이루어놓아 그 뒤로도 현상유지를 계속하다 조선 말기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일본의 강력한 면화재배 정책이 이루어 진다. 과수재배는 우리나라의 풍토에 적합하여 예로부터 각종 과일을 생산하여왔고, 각지에 명산지를 두기까지 하였다.

특히 제주도 및 남해연안의 귤재배는 크게 장려되기도 하였다. 서울 근교를 제외하고는 과수원다운 것이 거의 없었을 즈음인 1890년경에 길주, 원산, 대구 등지에 외국인이 서양사과, 복숭아, 서양배 등을 시험재배하여 이후 점차로 과수원규모의 재배가 활발히 시작되었다.

1905년경에 이르러서는 일본인 기업가들이 황주, 진남포, 경인지방, 경상북도지방, 특히 대구 주변, 구포·나주 등지에 각종 서양사과(祝, 紅魁, 紅玉, 滿紅 등)와 배(金村秋, 明月, 長十郎 등)를 대규모로 심게 되었고, 그 뒤 이 지방들은 사과 또는 배의 명산지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인들은 각종 작물의 품종도입과 아울러 경작법 이식에 부수하여 우선 일본제 농구의 판로를 얻게 되었다. 농기구의 수입 외에 일본인 공장(工匠)의 내왕이 잦아졌고 농구를 제작하여 공급하였다. 1908년에는 일본제 농구를 개량농구라 하여 일부 농민에게 무상배부한 것을 비롯하여 그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일본식괭이(備中鍬), 일본낫(松原鎌), 쇼벨, 도급기(稻扱器), 당기(唐箕), 연직기(筵織機), 관수차(灌水車) 등이 그 선구였다.

비료면에서도 통감정치 이래 우선 자급비료로서 퇴비증산, 녹비작물의 재배를 장려하면서 판매비료의 도입도 시작되었다. 재배면에서는 해이하여졌거나 근대과학의 조명을 받지 못한 종래의 여러 농법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즉, 선종(選種), 종자처리, 파종, 이앙, 시비, 중경, 제초, 병충해대책, 수확, 조제, 포장 등이 그들의 영향을 입기 시작하였다.

북학파 이래의 실학자들에 의한 농학은 서양의 농법이 상당히 반영이 된 것이기는 하지만, 보다 과학적인 근대농학이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병인양요·병자수호조약과 같은 열강들의 치열한 압력과 국내정변을 빈번히 겪는 속에서 개항이 강요되고서야 개화의 물결이 세게 닥치기에 이르렀다.

외국과의 문화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자 다른 문물과 함께 선진 농학 및 농업기술의 도입도 시작되었다. 최초의 견미보빙사(遣美報聘使)가 귀국한 뒤인 1884년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이 설치되고 잠상공사(蠶桑公司)가 창립되었다. 시험장에서는 각종 농작물(344종)과 가축(64두)이 도입, 육성되었으며, 수확물의 종자는 지방 여러 곳으로 보내 첨부된 해설서를 따라 재배하도록 권장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관리관이었던 최경석(崔景錫)이 갑자기 죽어 이 사업은 좌절되었다.

농학교육기관으로는 학부(學部)가 1904년에 설립한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가 그 효시이다. 이 학교에 부속하여 뚝섬에 실습과 연구를 위한 농장도 마련했으나 1906년에 수원의 권업모범장으로 흡수되었다. 농상공학교의 농과는 농림학교로 독립되어 1907년에 수원의 새 교사로 옮겼다. 일본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권업모범장은 일본화된 서양농법을 우리 나라에 이식하려고 일본 쌀품종의 도입·육종·보급을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이어서 각 도에는 종묘장(시험장)과 면화채종포를 설치하였다. 1910년에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농림학교는 조선총독부 농림학교로 개칭되고 권업모범장에 부속되었다. 그 뒤 농림전문학교(1918), 고등농림학교(1922), 수원농림전문학교(1944)로 개편·개명되었다. 농업계고등학교도 점차 늘어나 1942년에는 49개 학교에 달하였다. 농학연구기관인 모범시험장은 농사시험장으로 개칭되고 많은 산하기관을 설치하면서 식민지농업정책에 맞는 방향으로 강력히 추진되어 나갔다. 특히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으로 벼재배면적의 확대와 품종개량에 힘을 기울였다. 일제강점기의 우리 나라 농업근대화는 일본이 받아들인 서양농학을 밑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일본의 식민지정책과 자본진출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분적인 농업발전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으나, 서양농학의 과감한 도입과 우리 나라에 맞는 농학연구의 기회는 얻지 못했다.

조선후기의 우리나라의 농업을 고서를 통해 살펴보면 재배기술, 재배품목 등에 견주어 과도기적인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농업의 다변화시기인 조선후기에는 내부의 봉건적 시스템으로 한반도에 체계적으로 정착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1900년대에 들면서 일본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농촌진흥청 전신인 권업모범장을 위시로 일본 쌀품종의 도입·육종·보급 등을 중심으로 일본화 된 서양농법을 우리나라에 이식하려 했던 것이 근대농업의 첫걸음이라는 아위움을 갖는다. 이러한 우리나라에서의 근대농업의 출발이 현재까지도 그 잔흔이 남아있다는 씁쓸함을 갖는다. 또한 우리나라 농업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데에 우리국토에 맞는 우리다운 농업이 정착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구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다음 차에는 이러한 과도기적인 조선후기에 제주도에서의 농업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참고자료 : 사회과학출판사(2012), <조선농업사(원시∼근대편)>; 사계절(2015), <우리나라 농업의 역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헤드라인제주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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