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시대, 탐라 형성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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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 탐라 형성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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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10) 선사 시대의 제주의 농업

철기의 보급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며 북쪽의 철기 기술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이 때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은 선진 제도문물을 수용하고 우수한 철제 무기와 농기구의 도입을 농업을 바탕으로 고대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고구려는 압록강, 백제는 한강을 중심으로 토착세력을 규합하였고 신라와 가야는 한반도 남동지역에 이웃의 작은 나라들과 협력체계를 구축하며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워 나갔다. 그렇다면 선진문물·철제 기구의 도입이 늦은 제주의 고대국가로의 발전의 흔적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원후 2세기경 제주도는 취락과 거점 취락, 읍락과 읍락간의 관계, 국읍의 형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큰 마을의 형성을 알리는 용담동 유적과 삼양동 유적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유적으로 점토띠 토기와 송국리형 토기가 함께 유입되었다. 삼양동 마을의 주거 형태와 토기는 상모리식 토기를 사용하는 토착 집단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집단이이었다. 

삼양동 유적 안에는 크고 작은 움집, 창고, 저장공, 야외 토기요지, 조리장소, 마을 공간을 구획한 경계 석축과 배수로, 쓰례기장, 패총, 고인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주거지는 200여기나 된다. 거주지의 형태지 이중 원형 움집, 장방형 대형 움집, 부정형 주거지, 지상식 가옥 중 불다짐 처리된 주거지, 창고지 등이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규모를 합하면 실제 규모는 현재보다 3배 이상이 된다. 

이들 자료들을 대략적으로 분석해 보면, 크게 상모리 3단계 시기와 삼양동 2, 3차 시기(기원전 2∼1세기)의 주민 집단이 공존 하였을 것이다. 삼양동식 토기 사용 집단은 송국리형 집자리를 채택하고 있으며, 삼양동식 토기 초기 단계는 화강암 태토의 원형 점토띠 토기와 공반하고 있다. 이러한 원형 점토띠 토기는 종달리에서 삼양동으로 이어지는 제주 동북부 지역에 한정하여 분포하고 있다.

삼양동 마을과 같은 규모의 취락이 모여 중심적 기능이 강화되면 읍락의 읍이 되고 더욱 발전하면 국읍이 된다고 볼 수 있다. 1∼2세기경 고대 삼양동 마을은 적어도 읍락 정도의 규모가 된다. 삼양동 마을보다 더 큰 마을의 증거는 2세기경에 한천 서쪽 평탄 대지에 자리한 용담동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용담동 마을의 위상은 유물 분포지의 범위가 수만 평에 이르는 마을 공간의 규모, 고인돌군의 무게, 축조 기술의 우수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크게 보면 이 일대가 읍락의 읍이 자리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용담동 일대 조사가 진행되면서 용문로 유적에서 송국리형 주거지가 확인되었고, 고인돌, 대형 원형 주거지 군락을 비롯한 5기 이상의 원형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각 지점을 연결하면 대략 300,000㎡ 이상의 규모의 대형 마을터가 확인된다. 이 마을 면적은 고대 삼양동 마을의 150,000㎡와 비교하면 2배 이상이 된다. 따라서 이곳 용담동 일대에 큰 거점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어 탐라국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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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양동 유적지 작은 움집 터(왼쪽),용담동 유적지 인근 고인돌(오른쪽)

탐라국으로의 이행은 우선 국읍의 지배층의 존재를 찾아야 한다. 이런 증거는 1985년에 발굴된 용담동 적석 묘역 목곽묘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묘제는 위석형 병풍식 고인돌과 동일한 시기에 축조되었다. 2∼3세기경(삼양동 4차 시기)에 있어서 용담동, 삼양동, 외도동 마을의 비교 우위 분석이 가능하다. 즉, 삼양동 마을과 외도동 마을은 읍락 단계로 추정되며, 이보다 큰 마을인 거점 마을은 용담동 마을일 가능성이 크다. 한천변 용담동 일대의 거점 마을의 등장, 국읍의 형성과 관련된 자료는 용담동 무덤의 부장품에서 나타난다. 즉, 철제 장검, 단검, 창, 도끼, 화살촉, 유리 구슬 등의 세트화 된 중국 한나라 제품 등이 주목된다. 이 용담동 철기 부장 묘역은 부산 노포동 유적과 최근 김해 양동리 유적 출토 소용돌이 문양 장식 철검과 삼각형 철촉의 연대가 2세기 중반 이후로 잡고 있어 비교가 된다. 용담동 목관묘역은 선대의 공렬토기 집단의 석곽묘 묘역을 보호하여 선대의 토착 집단을 계승하는 양상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용담동 묘제와 삼양동의 마지막 시기의 상황을 고려하고 최근 조사된 외도동 유적의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용담동 목관묘 피장자는 전쟁이나 갈등의 정리 과정에서 등장하는 2∼3세기대 국읍의 수장일 가능성이 크다. 토기 집단으로 보면,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토착적인 제3단계 말기 공렬 토기 집단, 송국리 문화의 계보를 계승한 이질적인 삼양동식 토기 집단, 새롭게 등장한 철제 무기를 소유한 곽지리식 토기 사용 집단이 혼재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말기 공렬 토기 집단은 자연스럽게 곽지리식 토기 집단에 흡수·통합되었고, 삼양동식 토기 사용 집단은 그들 세력에 의해 밀려나간 상황을 용담동 묘역이 설명해 주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사실이지만 탐라국이 형성될 당시에 제주도 지역은 일도, 이도, 삼도 등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기에서 제주도에 등장하는 첫 정치·사회 조직은 이질적인 3개 집단과 문화가 통합되어 이루어졌음을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탐라국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마을과 읍락, 거점 읍락과 국읍의 탄생이라는 시간·공간적 범위로도 볼 수 있다.

탐라 성립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주거 양상에서 기존의 장방형 또는 방형계 주거형과는 다른 원형계의 송국리형 주거지가 출현한다. 취락의 규모면에서 보면, 상모리, 김녕리, 용담동 등의 소규모 취락 단계에서 이 시기가 되면 삼양동과 용담동 등에 비교적 규모가 큰 취락이 형성되는 단계에 해당한다. 토기 조합상에서 보면, 기존의 민무늬 토기와 차이를 보이고 있고 후행하는 곽지리식 토기와도 다른 양상을 보이는 시기로, 직립 구연 토기, 점토띠 토기, 삼양동식 토기 등이 중심 토기이다. 묘제상에서도 이 시기에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대외적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산지항과 삼양동 유적 등에서 외부와의 직·간접적인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 주는 대외 교류 유물이 다량 확인되고 있다. 계층 구조에 있어서도 옥환, 동검, 동촉 등 권위를 상징하는 위신재와 각종 장신구류 등 계층 구조의 불평등화를 시사하는 유물이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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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지항 출토 화폐 모습(왼쪽), 산지항 출토 유물(오른쪽)

탐라 성립 시기의 초기에 석기 사용도 꾸준히 증가하게 되지만, 후기에 새로이 철기가 등장하게 된다. 이 철기는 삼각형 점토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나 소형 철도자편 등 소량에 불과하며 다음 단계인 탐라 전기에 들어서서 철기의 유입과 사용이 증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탐라 시대 전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제주 전역이 곽지리식 토기 문화권으로 단일화하며, 종달리와 곽지리 등에 대규모의 패총이 등장하게 된다. 새로운 유력 개인묘인 철기 부장의 적석목곽묘가 출현하며 철기의 집중화 현상이 나타난다. 용담동 철기 부장묘의 철제 유물 세트는 탐라 성립기에 진행된 계층 구조의 불평등화가 심화되는 최고조의 과정에서 등장한 지배 계층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유적수가 급증한다. 이는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로 연결되며, 소규모 취락이 증가하게 되고 확대되는 일련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중심 취락의 기능과 역할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고인돌의 경우, 전시기에 비해 축조 형태의 우월성을 보이는 축조 기술상의 발전이 진행된다. 이는 노동력의 집약화가 강화되고 지배층의 위상이 높아져 고대국가 탐라국의 위상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 참고자료: 이영권(2004), <제주역사기행>; 강용희(2018), <제주토박이의 섬·바람·오름>, 국립제주박물관(2017), <국립제주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 코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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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돈 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 농촌지도사 ⓒ헤드라인제주
농촌지도사 이성돈의 '제주농업의 뿌리를 찾아서'는 제주농업의 역사를 탐색적으로 고찰하면서 오늘의 제주농업 가치를 찾고자 하는 목적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 기획 연재글은 △'선사시대의 제주의 농업'(10편) △'역사시대의 제주의 농업'(24편) △'제주농업의 발자취들'(24편) △' 제주농업의 푸른 미래'(9편) △'제주농업의 뿌리를 정리하고 나서' 편 순으로 이어질 예정입다.

제주대학교 농생명과학과 석사과정 수료했으며, 1995년 농촌진흥청 제주농업시험장 근무를 시작으로 해, 서귀포농업기술센터, 서부농업기술센터, 제주농업기술센터 등을 두루 거쳐 현재는 제주도농업기술원 기술지원조정과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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