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옳은 길이라 믿었기에..." 제주서 터져나온 첫 反정부 시위
상태바
"이 길이 옳은 길이라 믿었기에..." 제주서 터져나온 첫 反정부 시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
[1] '1985년 광양초등교 유세장 시위'

 1987년 6월, 최루가스의 따가운 눈물 속에서도 목놓아 외쳤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그 함성은 제주의 여름도 뜨겁게 달궜습니다. 광양로터리에서 중앙로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열망은 식을 줄 몰랐고, 침묵하던 이들의 박수도 터져나왔습니다.

그 뜨거운 함성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의 성과와 보람은 더욱 값지게 다가옵니다. 이제 세월은 흘러, 함성의 울림은 기억의 저편에 머물러 있지만, 6월항쟁의 정신은 오늘에 이어져 제주사회의 새로운 변혁의 동력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헤드라인제주는 6월항쟁 20주년을 기념해 제주민주화 운동사(史)를 재조명해보는 차원에서 <6월항쟁 20주년 특별기획-타는 목마름으로>를 연재 보도합니다. 이 특별기획은 제주지역 민주화운동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85년부터 1987년 6-7월항쟁의 절정기를 시간적 범주로 하여 보도됩니다. 각 연재물은 당시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졌던 사건을 중심으로 기획되며, 사건 당사자의 기억을 통하여 당시 사건의 실체를 조명해보고, 현재적 의의를 모색해 보고자 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이 기획연재의 저작권은 저자와 사진콘텐츠 저작권자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저자=윤철수, 사진콘텐츠 저작권=제주지역 6월항쟁기념사업회, 서귀포6월항쟁기념사업회, 진희종, 박희수, 고창후, 강호진, 양창용 등> 
 


▲ 1987년 6월, 제주에서도 독재타도와 호헌철폐를 외치는 시위가 연일 계속됐다. <6월항쟁20주년 사업추진위원회 DB>

[1] 1985년 광양초등교 유세장 시위


장기집권에 혈안이 된 군부독재정권의 서슬퍼런 통치가 자행되던 1985년 2월. 제12대 총선 후보자 합동연설회가 열리고 있었던 제주시 광양초등학교에서는 '민정당 심판'이라는 구호가 울려퍼졌다.

이것이 제주지역의 반정부 정치투쟁의 첫 신호탄이었다. 정치투쟁에 나선 사람은 다름아닌 졸업을 불과 일주일 남겨둔 제주대학교 4학년 여학생 3명. 장은심씨(45. 당시 제주대 수학교육과 4, 현 독일 발도르프 교육학 이수중), 김옥임씨(45. 당시 제주대 국문학과 4, 현 여성농민운동가), 오옥만씨(45. 당시 제주대 사회학과 4, 현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유세장에 몰린 많은 인파 속에서 이들은 민정당 후보가 연설을 하는 단상으로 달려가 반정부 구호를 외치고, 광주학살과 민생파탄의 책임이 있는 민정당을 심판하자고 외쳤다.

당시 제주신문과 제대신문에서는 이 사건을 짤막하게 보도했다.

유세장서 전단뿌려 여대생 3명에 구류

제주경찰서는 지난 9일 제주시 광양국민학교에서 열렸던 12대총선 후보자 합동연설회장에서 전단 2백여장을 뿌린 장은심 양(22. 제주대 수학교육과4) 등 3명을 11일 즉결심판에 넘겨 장양에게 구류 5일, 그리고 오옥만 양(21. 제주대 사회학과4)과 김옥임 양(22. 제주대 국문학과4) 등 2명에게 각각 3일간의 구류처분을 받게했다. <제주신문 1985년 2월12일자 7면 보도>
▲ <제주신문 1985년 2월12일자 기사. 오옥만씨 등이 광양초등학교에서 열린 유세장 시위사건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장은심 양 등 3명 유기정학.근신처벌

본교 학생 3명이 지난 9일 제12대 총선 후보자 합동연설회장인 제주시 광양국교 운동장에서 '12대총선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유인물을 배포하다 경찰에 의해 연행돼 3일에서 5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장은심(수학교육 4), 김옥임(국어국문 4), 오옥만(사회학 4) 양 등 3명이 제12대 총선후보자 합동연설회장에서 민정당 후보의 유세도중 "오늘의 현실은 유신체제의 반민주적 요소가 일소되기는 커녕 오히려 심화되고 있고 국민의 자유는 더욱 위축되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하다 붙잡힌 것이다.
이들은 경찰에 의해 지난 11일 즉결심판에 넘겨져 장양은 5일간의 구류, 김양과 오양은 각각 3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한편 학교당국은 장양에게는 유기정학 2주, 오양과 김양에게는 각각 근신 1주처분을 내렸다.
<제대신문 1985년 2월21일자 보도>
▲ <제대신문 1985년 2월21일자 보도. 장은심씨를 비롯한 3명이 학사징계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짤막한 보도의 내용처럼, 이 시위는 극히 짧은 시간에 이뤄졌다. 유인물을 뿌리며 구호를 외치다 경찰에 의해 곧바로 연행됐다. 그러나 이들의 이날 시위는 제주민주화운동사에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만 이뤄져 오던 민주화에 대한 논의, 그리고 차마 공공장소에서는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웠던 군부독재정권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시위와 집회가 일부 있었긴 했다. 주로 학원자율화나 지역문제 등이었다. 정치적 문제가 촉발되어 언론보도에까지 이르게 된 사건은 이 유세장 시위가 처음이었다. 이 때문에 이 시위가 갖는 특별한 의미는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졸업을 일주일일 앞둔 4학년생 3명이 학사징계를 각오하면서 이같은 시위에 나서게 된 것일까. 자칫 학사징계로 인해 졸업을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 왜 3명만이 시위에 나서야 했던 것일까.

이러한 궁금증은 현재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열린우리당, 비례대표)을 지내는 오옥만씨와의 인터뷰를 통해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사건을 재조명해보면, 불과 10여분 밖에 안되는 상황이었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 준비돼 온 '거사'였다.

81학번인 이들 3명 중  현재 여성농민운동을 하고 있는 김옥임씨는 제주대 재학시절 탐라민속문화연구회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오옥만씨와 장은심씨는 학습조직(일명 '언더'라고 불림)에서 활동했다.

소규모 단위로 비밀리에 이뤄지는 학습조직은 사회과학도서를 통해 공부하며 정치문제와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방향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탐라민속연구회 동아리의 경우에도 이러한 내부 학습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 오옥만 의원이 1985년 광양초등학교 유세장 시위사건을 하게 된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옥만씨는 대학에 입학하던 1981년 제주대학의 학내 분위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처음 입학했을 때 학내는 '학생운동'과는 거리가 있었죠. '운동권'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았고, '불순세력' '불온세력'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어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 얼마나 우스운지..."

그가 학습조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입학하던 해 5월.
"체육대회가 끝난 후 얼마없어 같은 학과 2학년 남자선배가 찾아와 차 한잔 마시자고 했어요. 그래서 (제주시)중앙로에 있는 J다방에 가서 차를 마셨는데, 그 선배는 제가 체육대회 때 앞에서 너무 열심히 응원하는 모습, 그리고 학과행사 때 적극적으로 발표하곤 하니까 그게 눈에 띄었나봐요."

선배의 학습조직 참여권유에 그는 한참을 생각하다 바로 동의했다.
"너무 감동적이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이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많구나. 고3때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거기에 보면 자체적인 학습팀을 만들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일단은 책을 읽고 토론한다는 그 선배의 말에 솔깃했고, 두번째는 나의 인식이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하고 경험했던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새로운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이런 생각에서 '언더'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열심히 쫓아다녔죠."

학습은 한팀에 3-4명쯤 되는데, 그는 자신을 끌어들인 선배의 지도를 받으며 책을 읽고 토론에 참여했다. 그가 기억하는 학습과 토론용으로 쓰인 사회과학도서는 해방이후 북간도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북간도>라든지, 장준하의 <돌베개>, 그리고 <전환시대의 논리>, <해방전후사의 인식>, 이에치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이다.

"지금 보면 이러한 사회과학 도서들이 별 문제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그때는 달랐어요. 조금만 비판적 내용이 들어가거나 이념적 내용이 있으면 '불온서적' 취급 당하곤 했으니까요. 그 중에서 철학책은 일어로 된 원서로 읽었던 기억이 나요. 책도 아무 서점에서 팔지 않았어요. 그 때 제주시에서 이러한 사회과학서적을 판매하는 서점은 '제주서림'과 '에덴서점'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아요. 나중에야 전문 사회과학서점인 '사인자'가 생겼으니까요. "

학습은 주로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이뤄졌다. "첫 학습은 다방에서 모여서 했었고, 토요일 같은 때에는 성산일출봉 바닷가에서 토론을 하기도 했어요. 학내에서는 주로 빈강의실을 찾아 다녔어요."

당시 학내에서 부르던 '민중가요' 역시 다양하지 않았다.
"3학년때 쯤인가, '임을 위한 행진곡' '농민가'를 불렀는데, 가슴이 뭉클하고 진한 감동을 느꼈어요. 그 전에는 성경노래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아침이슬' 등을 부르곤 했는데,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 이 판매금지되어서 복사본이 나왔어요. 노래테잎이 육지부에서 내려왔는데, 그 테잎을 여러개로 복사하고 가사를 받아써서 노래를 불렀는데, 너무 맘에 들어서 매일 흥얼거리며 다녔어요. 노래가 나의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너무 좋았죠."

그러나 학습조직생활을 하는 동안 오옥만씨 역시 나름대로 갈등이 많았다.
"모든 부모가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도 대학 졸업해서 좋은데 취직을 하길 바랐어요. '언더'생활을 하면서 왠지 모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졸업후 나의 모습이 어떻게 될까 하는 두려움, 이것이 옳은 것이기는 하지만, 혹 경찰에 붙들려가서 어떤 상처나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이런 것 때문에 때론 그만 둘까도 많이 생각했어요. 하지만 내가 가는 길이 옳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나의 눈 속에 비추어지는 사회는 너무 모순 투성이었기에 이게 내 운명인가 했어요."

"때로는 남들은 멋부리고 데이트하며 평화롭게 세상을 사는 것 같은데, 내 친구들은 왜 저렇게 행복할까, 내가 보는 세상은 너무 어렵고, 민주주의와 부정의가 판치는데 하며 갈등도 많았죠."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대학은 1984년 11월을 전후해 오랫동안 끌어오던 총학생회장 직선제 선출 등 '학원자율화 싸움'을 마무리하게 된다. 학원자율화 싸움 마무리와 동시에 오옥만씨는 졸업의 문턱에 놓이게 된다.

#"대학졸업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논의 끝에 유세장 시위 결의


마지막 겨울방학인 12월말쯤, 그는 졸업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고민은 유독 그 뿐만이 아니었다. 동아리나 학습조직에서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해왔던 4학년생들의 한결같은 고민이었다. 겨울방학에 접어들면서 이제 졸업을 해야 하는 4학년생들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내부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지금있는 역량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자. 즉, 졸업해서 재생산(학습조직을 계속적으로 확대 운영)을 초점으로 해 조직역량을 강화시키자는 의견을 내놓았어요. 왜냐하면 그 때 당시 조직역량은 미흡했고, 시민사회 속에서 표출될 수 있는 투쟁수위가 '타도하자'는 발언은 내놓지도 못할 분위기였으니까요. '독재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쳤다가는, 그러면 몇년 감옥에서 살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부분은 당시 대부분이 공감했어요.
일부는 자기결단적인 사회정치투쟁을 한번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뭔가 촉발제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였죠. 그래야 제주에서도 독재정권에 맞선 투쟁이 시작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죠."

졸업을 맞이한 4학년생들의 논의는 이듬해인 1985년 1월초쯤 최종 결정됐다. 2월 예정된 12대 총선 유세일정에 맞춰 장외투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 결정이 내려진 후, 곧 구체적 유세일정 확인에 들어갔고, 최종 '거사'일정은 2월9일 오전 제주시 광양초등학교에서 열리는 후보자 유세에 맞추기로 했다. 민정당 후보가 단상에 올라와 연설을 하는 시간에 맞춰 시위를 한다는 계획이었다.

누가 할 것이냐는 논의에 있어 4학년생 중 장은심, 김옥임, 오옥만 등 3명이 결의했다.
"우리가 졸업하면서 모범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런 자기결단을 해야 졸업해서 사회에 나가더라도 싸울 수 있다. 그래서 우리 3명이 결단을 내린거예요."

이 결정이 내려진 과정에서는 학습조직을 지도했던 학외인사들의 조언도 컸다. 결단을 내린 3명은 곧바로 제주시 서문통에 방 한칸을 빌어 함께 생활했다.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한달 가까이 생활을 했다. 서로 마지막 투쟁의지를 다지고, 철저한 준비를 기하기 위해서다.

"방을 빌어서 함께 생활했는데, 밖에 거의 나가지 않았어요. 밥도 밖에 나가서 사먹지 않고 방 안에서 해먹었는데, 참치넣은 김치찌개와 라면 정말 많이 해서 먹었던 것 같아요."

디데이일인 2월9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의 '합숙장'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등사기를 구입해서 방안에 뒀다. 그리고 경찰에 잡혔갔을 경우 경찰조사에 임하는 방법, 진술서 쓰는 방법을 연습하기도 했다.

2월9일 유세장에 뿌려질 유인물도 작성되기 시작했다. <우리의 입장>이란 제목의 유인물 내용은
서론 부분에서는 총선에 대한 입장을 적었고, 결론적으로는 왜 민정당 후보가 당선되어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썼다. 민생을 파탄내고 광주학살의 문제도 담았다.

유인물 살포에 앞서 이 유인물들은 제주도내 일선교사에게도 편지로 부쳐졌다.
"방안에서 우편번호 찾아서 각 학교 선생님에게 모두 보냈어요. 그리고 밤에는 미리 준비해둔 등사기로 롤링을 하는 방법으로 유인물을 만들었어요. 모든 준비작업이 끝난 셈이죠."

#"어머니, 제가 선택한 이 길이 옳은 길이라 믿기에..."

 

▲ 오옥만 의원이 인터뷰를 하던 중 옛 민주화운동 동지로부터 전화를 받아 대화하고 있다.

유세장 시위 하루전인 2월8일 밤, 이들은 미리 준비해둔 유인물 중 일부를 갖고 일명 '피 뿌리기'(피는PAPER의 약자를 썼다고 한다. '피 뿌리기는 유인물을 살포하는 행위를 뜻하는 당시 은어다.)작업에 나섰다. 이 작업은 제주시 광양주변을 중심으로 해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계속됐다.

"새벽녘에 주택가를 돌며 옷 속에 숨겨둔 유인물을 한장한장 꺼내어 뿌리는 작업이었는데, 후배 한명이 따라 붙기는 했지만 정말 떨리고 무서웠어요. 그래도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담담한 마음으로 작업을 했어요. 이 유인물을 받아보고 읽은 사람들이 많이 공감을 해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디데이일인 2월9일 아침 '피 뿌리기' 작업을 마치고 합숙장으로 돌아온 오옥만이 가장 먼저 한일은 홀로계신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나중에 내가 경찰에 잡혔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머니가 크게 걱정하실 것 같아 편지를 썼어요.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딸 부잣집에서 막내인데,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나의 마음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오늘 이런 상황이 있으니 절대 충격받지 마세요.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잘 살테니 절 믿어주세요. 이게 올바르게 사는 길이라 생각해 이 길을 선택했어요. 어머니께 불효하는 것 같아 미안해요.' 대충 이런 내용이었어요."

그의 이 편지는 친구에게 전해졌다. 오전 10시가 지나면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거사' 시간이 10시였기에 그 전에 전해주면 절대 안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유세장 연단 앞에서는 유인물이 날리고, '민정당 심판' 구호 터져나와

편지를 전하고 난 후, 한 숨도 자지 않은 채 이들은 안경도 바꾸고, 옷도 바꿔입고, 자취집 방안의 흔적도 모두 지우고, 남은 자료도 모두 태우고 해서 밖으로 나갔다.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두툼한 점퍼 안에는 둘둘 말아진 유인물이 숨겨져 있었다. 각자 흩어져 따로따로 광양초등학교로 집결하기로 했다. 오옥만씨는 택시를 타고 광양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내렸다.

"택시에서 내리니까,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운동장은 물론이고 학교 울타리 위에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차 있었어요. 순간 정말 긴장이 되었죠.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 머릿속은 온통 이 생각 뿐이었어요."

운동장을 가득찬 사람들 사이를 지나 오옥만씨는 연단 앞 부분에 자리를 잡았다. 다른 2명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무사히 자리를 잡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3번재 연사인 민정당 후보가 연설을 할 시간이 되었다. 그 후보가 올라와서 인사말을 하고 5분정도 시간이 지났을때, 그는 "이 때구나"하고 생각했다.

오옥만씨는 벌떡 일어나 단상앞으로 달려가서는 주저하지 않고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민생파탄 광주학살 민정당을 심판한다!"

다른 2명이 동시에 가세하면서, 유인물은 여기 저기서 흩날렸고, 구호소리는 더욱 커졌다. 갑자기 발생한 돌발적인 상황에 후보자는 연설을 잠깐 멈췄다. 청중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바로 경찰들이 이들의 팔을 붙잡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3명은 검은 지프형경찰차에 태워지는 순간까지 구호를 멈추지 않았다. 이들의 잠깐동안의 시위는 이것으로 일단 마무리됐다.

#즉결심판에 넘겨지고, 대학에서는 학사징계 처분받아

이들은 현 관덕정 옆에 위치한 제주도경으로 연행됐다.
"연행되었을 때에는 마음이 정말 편했어요. 긴장감도 풀렸고, 그리고 내가 해내긴 했구나 하는 뿌듯한 마음도 생기고..."

연행되던 날 오옥만씨의 어머니도 가족들과 함께 경찰서를 찾았다. 딸의 얼굴을 마주한 어머니는 "얻어맞지 않았느냐"고 제일 먼저 물었다고 한다. "밥은 잘 주느냐", "잠은 잘 재우느냐", "통통하던 애가 이렇게 말랐으니..."하며 어쩔줄 몰라했다.

조사는 이틀에 걸쳐 이뤄졌다. 이틀 후 이들은 즉결심판에 넘겨져 장은심씨는 구류 5일, 김옥임씨와 오옥만씨는 각각 구류 3일에 처해졌다. 이어 제주대학교 당국은 장은심씨에게 유기정학 2주, 오옥만씨와 김옥임씨에게는 각각 근신 1주 처분을 내렸다.

졸업을 앞둔 여대생 3명의 '용기있는 행동'은 제주대 학생운동권 진영에 큰 반향을 불러일키면서, 정권에 대한 항변을 수면 아래가 아닌 위로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된다. 가슴 속에 담아두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드디어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 현재 장은심씨는 독일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고, 김옥임씨는 여성농민운동가(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부회장)로, 오옥만씨는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시인>

 

[사건 후 오옥만씨는...]

이 사건이 있은 후 오옥만씨를 비롯한 3명은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이들은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나란히 사회과학도서를 전문으로 하는 제주 최초의 서점인 '사인자'에서 일을 했다. 이 사인자 서점은 전남대에 재학중이다 5.18 광주항쟁을 맞게 돼 당시 전남도청에서 특전사의 마지막 진압작전이 이뤄질때까지 저항하다 투옥됐던 진희종씨 등이 주도해 만든 서점이다.

오옥만씨는 "그 때 당시 남들처럼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없었다. 사회민주화를 위해 한평생 나가겠다고 결의를 하고 대학졸업을 맞게 됐는데, 개인적인 생활은 상상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졸업 후 사인자 서점에서 일을 하고, 개인적으로는 신문배달도 하면서 사회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며 "사회운동의 장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있어서 노동운동 등도 많이 생각했었다"고 회고했다.

그후 오옥만씨는 1987년 6월항쟁에 참여하며 재야운동에 본격 나서게 된다. 1987년 후반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 제주본부의 여성위원장을 맡아 활동했고, 1989년 4월 출범한 제주민족민주운동협의회(제민협)에서는 정책실장(1989)과 사무국장(1990)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 이후 사단법인 제주여민회 대표를 맡아 여성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제주특별자치도의회에 입성했다. 

   
 
  ▲ '유세장 시위' 사건 이후, 사회민주화를 향한 활동과정을 설명하는 오옥만씨.  
 
재야운동과 시민운동에서 2004년 돌연 열린우리당에 입당하게 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성운동 하면서 자치분권에 대해서 많은 고민하게 됐다. 군부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등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사회운동의 형태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반독재 민주쟁취라는 단일한 목표가 있었으나 지금은 계층별.부문별 다양한 요구가 분출되고 운동의 형태도 매우 다양해졌다. 이제까지 해왔던 일들을 제도권 내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내고 싶었는데, 2004년 노무현 탄핵정국의 상황 속에서 입당을 결심한 것이다."

재야운동과 여성운동에 매진해오다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원으로 나서 실제 의정활동을 하면서 갖는 마음의 자세에 대한 물음에는, "지역구 의원이 지역구 주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처럼 내가 해왔던 재야운동, 시민운동, 여성운동을 내 지역구처럼 의견을 수렴하고 대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항상 한다. 그러나 방식은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당시 함께 활동했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전국적인 인맥들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민주화운동과 재야운동을 통해 형성된 전국적 인맥이 의정활동에 큰 도움이 된다"며 6월항쟁으로 형성된 인맥이 왕성활 의정활동을 하는 동력이 되고 있음을 강조했다.

해군기지 반대투쟁 등 지금도 시민들이 참여하는 집회현장에 달려가곤 하는 그는 "20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6월항쟁의 그 정신은 아직도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다"며 "이러한 소중한 마음을 한데 모아, 이제부터는 진정한 제주의 발전, 그리고 진정 평화로운 제주를 만들기 위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타는 목마름으로> 책자 및 기사의 1차적 저작권은 저자인 윤철수, 그리고 기사 및 책 속에 담긴 사진콘텐츠는 서귀포6월항쟁기념사회에 있습니다. 사진 콘텐츠 중 일부는 제주지역 6월항쟁 20주년 기념사업회에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딥페이크등(영상‧음향‧이미지)을 이용한 선거운동 및 후보자 등에 대한 허위사실공표‧비방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므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삭제 또는 고발될 수 있음)
댓글수정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