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들꽃마다 4.3의 아픔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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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들꽃마다 4.3의 아픔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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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훈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 <43>열두 달의 꽃과 4.3

제주는 일 년 열두 달 꽃이 피고, 또한 일 년 열두 달 내내 4・3의 아픔이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4・3을 찾아 떠나면서 꽃 또한 찾아봅니다. 철마다 다투어 피어나는 꽃들 중에 어느 것인들 이쁘지 않겠습니까만, 그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골라 만나러 가 봅니다. 깨물어 어느 손가락인들 아프지 않겠습니까마는, 열두 달 내내 이어지는 4・3의 아픔들 중에 대표적인 곳을 헤아려 떠나갑니다.

(이 글에 나오는 사진들은 저보다 먼저 들꽃을 찾아 길을 나선 제주작가회의 김창집 선생님의 제주작가회의 카페 http://cafe.daum.net/jejuwriters에 올린 사진을 무단 도용했습니다. 이 점 김 선생님께 양해를 구합니다.)

지천으로 널어진 억새며 들꽃들이 제주4・3의 영혼들이라 생각하며 그들을 만나러 길을 나섭니다. 그들은 해마다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며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보살핌도 없이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린 강인함
그 외롭고 쓸쓸한 길을
나도 가고 있다
- 김문택의 시, 「야생화」전문

가는 길에 먹거리가 되는 산나물이며 열매도 좀 찾아 먹고 경작지에 심어진 작물들도 살피겠습니다. 이 먹거리들이야말로 조상 대대로 먹고 싸고 유전되어 저들의 몸속에 우리의 기억이 숨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기억 속에 저들의 기운이 자라고 있어 이미 우리는 자연의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자, 이제 그들을 만나는 여정을 떠나 봅시다. 가는 길에 제주의 자연을 노래한 제주작가회의 시인들의 시편들도 함께 동행합니다.

1월 초순경에 귀덕리 강요배 화백 댁에 가서 뜰에 만개한 수선화를 보면서 막걸리 한잔을 합니다. 강 화백은 잘 아다시피 제주4・3을 연작 그림으로 그리신 분입니다. 강 화백은 불시에 방문을 해도 쓰다달다 내색을 않습니다. 다만 막걸리 다섯 병 정도만 들고 가면 입이 흐믓하게 벌어집니다. 막사발에 막걸리를 따르고 금잔옥대 수선화 꽃 한 송이를 띄워 놓고 꽃술을 건배합니다. 수선화 향이 먼저 가득 코를 자극합니다.

꽃 내음에 취해
죽어도 좋으리
그대 사랑
지천으로 흐드러졌으니
나 여기에
묻혀
꽃이 되어도 좋으리
- 김경훈의 시, 「수선화 밭에서」 전문

1월은 아무래도 1949년 1월 17일의 북촌 대학살이 떠오르는 달입니다. 강요배 화백네 뜰에서 수선화 뿌리를 한 세 마대 얻어다가 북촌 너분숭이 옴팡밭 옆에 심었습니다. 지난주에 가서 보니 제법 왕성하게 싹이 돋고 꽃도 더러 피어 있었습니다.

한라산 들오름에
봄 햇살이 들기까지는
아직도 멀기만 한데
북풍한설 차가운 눈더미 위로
솟구쳐 피어난 노란 눈물꽃은
처절한 복수를 꿈꾸는 것이냐
대명천지에 밝은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냐
- 오승국의 시, 「복수초」부분

2월은 제주읍 동부 8리 대토벌이 떠오릅니다. 관음사나 제주4・3평화기념관 주변에 핀 복수초를 보러 갑니다. 복수초福壽草는 말뜻 그대로 복을 기원하는 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얼음새꽃이라고도 하는데 아무래도 눈雪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이 복수초꽃 사진은 항상 눈 속에 피어 있는 것을 자주 봅니다만, 저는 아직 그 현장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그 모습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3월은 제주4・3의 도화선이 되었던 1947년 3・1시위를 생각합니다. 뒤이은 총파업. 우선 그 역사의 현장인 관덕정에 갑니다. 그 다음 차를 돌려 조천리로 향합니다. 4・3당시 고문치사 당했던 조천중학원생 김용철의 묘소를 찾아갑니다. 그도 아니면 산남으로 차를 돌려 중문지서 파업 현장을 보러 갑니다. 서귀포 걸매공원의 붉은 매화를 봅니다. 

어쩔 것인가 순명처럼 찾아오는
노란 햇살 한 줌 꽃망울에 입 맞추면
가슴 연 암술머리에
붉은 핏줄 서는 것을.
- 오영호의 시, 「매화 벙글 무렵」 부분

4월은 4・3봉기와 4・28평화협상의 달입니다. 오름마다 타올랐던 그 봉화를 연상하기 위해 아무 오름이나 오릅니다. 한라산 어승생오름도 좋겠지요. 다음엔 평화협상이 진행되었다는 구억리 현장을 찾아갑니다. 4월에는 아무래도 유채를 먼저 떠올립니다. 4・3당시에 있었던 꽃은 아니지만요. 산수유나 천왕사 입구 쪽에 있는 노란 생강나무꽃도 생각납니다. 아니 그냥 지천으로 흐드러지는 민들레나 개나리도 이 시기 4・3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러고 보니 모두 노란색 일색이네요.
 

눈물부터 앞세워 4월을 적시는구나
가시밭길 헤맸던 님들 이맘때 되살아나
오늘은 어디로 갈까, 망설이는 봄날을
꽃 냄새 피 냄새 풍기며 절뚝거리며
깔깔깔 웃다 머리 풀고
돌담 아래 쓰러지던 누이들아
- 김석교의 시, 「유채꽃」전문

5월엔 당연히 5・10 단독선거를 거부해서 입산한 ‘한라산 자락 백성들’을 생각합니다. 4・3 당시의 5월엔 오라리 방화사건과 미군정 수뇌회의도 있군요. 강요배 화백이 그린 ‘한라산 자락 백성들’의 배경인 용강마을 쪽으로 찾아가서 고사리도 꺾고 더덕도 캡니다. 그 당시 소풍가듯 입산했던 도민들의 정서를 그대로 따라 해보는 겁니다. 한라산 진달래와 철쭉이 이 시기에 불끈불끈 피어납니다. 정군칠 시인의 다음의 시에 보면, 노루 발자국 따라 철쭉들이 다투어 피어난다는 그 발상이 참 재미있습니다.

엉덩이 불 댄 어린 노루들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다
가도 가도 불덩이다

숨죽여 있던 불씨들이
노루발바닥에 묻어
사방으로 튄다
- 정군칠의 시, 「철쭉」 부분

6월엔 ‘이덕구 산전’ 가는 길의 산딸나무꽃입니다. 6월 7일이 이덕구가 전사한 날이고 그 전날인 현충일 날 우리는 매해 산전엘 가고 있습니다. 산딸나무꽃이 마치 그날 산화해간 모든 영혼처럼 펼쳐져 있음을 봅니다.

수천수만의 나비 떼
훨훨 날으는
푸른 하늘을 열어야지
꽃보다 더 꽃 같게
꽃 같게 보다 더 달콤한 꽃으로
세상 맛나게 버무리려는 거다.
-김순남의 시, 「산딸나무꽃」부분

이달 말부터는 구좌읍 하도리 종달리 해안도로를 따라 수국꽃이 도열하듯 피어납니다. 절경인 해안도로를 더 예쁘게 수놓고 있는 수국꽃길을 따라 걷다가 주변 해녀횟집에 가서 소라 한 접시에 소주 두 병쯤 사서 바닷가 바위에 앉아서 마시는 그 맛 또한 아주 일품입니다. 올해는 강덕순씨와 다녀왔는데 내년엔 김석순씨나 한번 꼬셔볼까요?

7월엔 애월읍 하가리 연화못이나 용흥리의 연꽃을 보러 갑니다. 연화못은 너무 잘 꾸며놔서 옛날의 흥취가 덜 하지만요, 용흥리의 아주 작은 연못에 핀 수련은 참 예쁩니다. 거기 들러 연꽃을 본 다음 아라동 쪽에 있는 '필연'이라는 밥집에서 연잎밥을 먹는 것도 꽤 괜찮은 풍미가 될 듯합니다. 어허! 이거 말이 또 먹는 쪽으로 계속 빗나갑니다 그려.

반나절
생이라지만
그렇게 가는 거다

슬픈 눈빛으로
하늘만 쳐다보다

잠길 듯
목울대 위에
무지개를
띄운다
- 장영춘의 시, 「어리연꽃」전문

8월엔 음력 7월 칠석날, 섯알오름 학살터를 다녀옵니다. 시간이 더 있으면 만뱅디 공동묘지나 백조일손지묘를 돌아보는 것도 좋겠지요. 칠석날이라 그런지 이날은 꼭 상사화를 보리라 다짐합니다. 조천읍 와흘리에 있는 와흘당에 가면 상사화 몇 송이 꼭 피어 있습니다. 언젠가 그 뿌리를 캐서 대구 ‘극단 함께사는세상’의 혜림이에게 주었는데, 몇 년 후 그녀가 사고로 세상을 하직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슴이 갈래갈래 찢어졌습니다.

그땐 벼랑길도
함께 갈 수 있다 그랬지

비구니 승방 앞뜰에
화두처럼 다가온 너

잎 두고 저만 피어서
어떡하잔
말이냐
- 한희정의 시, 「상사화」전문

9월 초에는 무명천 진아영 할머니 제사가 있습니다. 할머니를 닮은 이질풀이나 선인장 꽃을 찾아봅니다. 9월 28일은 도두봉에 올라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인 문상길이 총살당한 수색 쪽을 바라보며 그분들에게 술 한 잔씩 올리고 음복을 합니다.

제주4・3의 10월은, 송요찬 9연대장이 해안선 5km 이상 지역에 통행금지 포고령을 발표하고,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나며, 이덕구 명의로 정부에 선전포고를 하는 등 숨 가쁘게 진행됩니다. 대량학살의 전주곡이 바람이 구름과 비를 모으듯 그렇게 흘러갑니다. 10월엔 용눈이오름에 올라 물매화나 꽃향유 등을 살펴봅니다. 이들이라도 보지 않으면 마음이 더 협착해져서 견딜 수 없어지는 그런 달입니다.
제비꽃, 물매화, 꽃향유, 할미꽃 다 숨어 있다
억새풀들 견디기 힘들었던 상처 있다
허공에 까마귀 울음 있다
내려다보니 흙에 묻히는 죽음 있다
-문영종의 시, 「용눈이오름」부분

11월엔 다랑쉬를 찾아가야겠네요. 이 시기부터는 제주4・3 학살이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무차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는 달입니다. 핏빛을 머금고 지천으로 피어 흔들리는 억새와 들국화 종류가 이때의 꽃이 아닌가 합니다.

바람결에 잠깐 흔들린다고 부끄러워 마라
먹장 같은 구름도 옮기는 바람 아니더냐
혼자 꿋꿋이 버티며 사는 것들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니 몇 안 되더라
- 김영미의 시, 「억새」부분

빈집 마당에는 바다가 들어와 산다
섬 끝 절망에도 제 빛깔을 꼭 챙기는
낮은 키 쑥부쟁이가 빈말에도 푸르다.
- 홍경희의 시 「섬 쑥부쟁이」부분 

12월입니다. 안덕면 동광리 순례가 제격일 것 같습니다. 무등이왓 삼밭구석 등의 잃어버린 마을과 헛묘와 큰넓궤를 돌아보면 추운 날씨보다 더 마음이 저려옵니다. 12월은 동백꽃이겠네요. 선흘리 동백동산 숲길이나 위미2리 동백나무 군락지를 가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초봄, 아직 일러
돋지 못한 순도 많은데
서두른 탓일까, 꽃봉오리
시들 채비도 없이
삽시에
모로 떨어져
신열로 뒤척이는 꽃
- 강덕환의 시 「동백꽃」전문 

이렇게 다달이 떠나다가, 어느 때쯤 문득 작심해서 제주도를 걸어서 동서나 남북으로 종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더 작정을 해서 해안선을 따라 무조건 걸어보자는 생각을 굳히고 있습니다. 예전에 일주도로를 따라서 차로 한번 돌아본 일이 있는데요. 시속 50km 정도로 쉬지 않고 달리면 한 다섯 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대략 220km 정도의 길이입니다.

그 길을, 며칠, 몇 달, 몇 년이 걸리더라도 다 직접 저의 발로 걷고 싶습니다. 이 땅에 피어난 모든 풀들과 나무들과 곡식들과 마음을 열어 말을 걸면서 말입니다. 산 자며 죽은 자까지, 아는 지인들도 쉬멍쉬멍 찾아 가고, 4・3의 영혼들도 한 분 한 분 천천히 만나면서, 긴 호흡으로 느릿느릿, 주왁주왁 간세하며 걸어보고 싶습니다.

산 자며 죽은 자까지 통곡소리 멎지 않은
뼈 속도 시린 겨울 청상 같은 별이 떠
오늘 뉘 누명의 눈물 보리밭에 흩뿌리나
- 이애자의 시 「알뜨르 보리밭」부분

<헤드라인제주>

김경훈 시인이 시(詩)로 전하는 세상살이 이야기는...

 
   
 
 
김경훈 객원필진. <헤드라인제주>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4.3이야기, 현시대의 시사문제, 책을 읽은 후의 느낌, 삶의 의미과 가치에 대한 생각 등을 시(詩)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봅니다.

 프로필.

1962년 제주에서 태어났고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우아한 막창」,「운동부족」, 「한라산의 겨울」, 「고운 아이 다 죽고」,「삼돌이네집」, 「눈물 밥 한숨 잉걸」이 있고 마당극대본집으로 「살짜기옵서예」가 있다. 

제주 4.3 일본어 시집 「불복종의 한라산」도 최근 출간했다. 제주MBC 라디오 제주4.3 드라마 10부작「한라산」을 집필했다.

제주4.3 연구서인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와 「그늘 속의 4.3」,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인들」을 공동집필했다. 현재 제주4.3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헤드라인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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