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들의 화려한 '야밤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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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들의 화려한 '야밤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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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미의 사는이야기] (35) 세희(細 喜)…4

올해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다. 1학기 개학 때도 눈이 펑펑 내려 휠체어가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는 바람에 첫 주 수업부터 어느 교수님의 우스갯소리처럼 내 맘대로 자체휴강을 한 격이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2학기에도 학기 초에는 태풍이 불어 비바람과 싸우며 다니느라 힘을 빼더니만 학기말이 되자 또다시 눈이 펑펑 쏟아지고 추워지는 바람에 국문학과 학생들을 위해 개설되었다는 특강에도 겨우 이틀을 나가고 나머지는 못 듣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하지만 눈이 많이 내려서 그런지 다른 해에 비해서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도 전부터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될 것 같다는 기대감에 어린아이처럼 괜히 들뜨고 신이 났다.

회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정신없이 눈이 펑펑 쏟아져 하얗게 되는 바깥을 보면서,
"와!…… 신난다. 눈이다. 눈!…… 마음아! 눈 온다……"하고 신이 난 나는 마음이 녀석을 돌아보면서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보다도 추운 것을 더 싫어하는 녀석은 제 집속에 쏙 들어가 앉은 채 꼼짝도 않고 말똥말똥, "뭐 하세요?"하는 뚱한 시선으로 나를 흘깃 보더니만 그 자리에 푹 엎드리고는 눈을 스윽 감으며 나의 들뜬 마음을 매정하게 외면해버렸다.

"에이, 무드라고는 없는 무식한 넘…… 쯧쯧……"
나를 무시하는 녀석에게 꿍얼거려주고는 여전히 유리창에 코를 박으며 펑펑 쏟아지는 눈 구경을 하다 몸이 저릴 만큼 차가워져서야 부들거리며 돌아와 이불속으로 몸을 담았다.

언제나 그렇긴 하지만 크리스마스엔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들뜨고 괜히 뭔가를 기다리게 된다. 아이들처럼 매해마다 마음이 둥실거리며 들뜨기는 하지만 들뜬 그 느낌은 일주일 전부터 불어놓은 풍선처럼 부풀었다가 점점 작아져서는 막상 크리스마스가 되면 볼품없이 쪼그라든 풍선의 잔해를 누가 볼까, 민망해지지 않으려 쓰레기통에 후다닥 숨기게 되곤 한다.

그리고는 시치미를 떼고 사람들에게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친다.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되세요!"

그런 외침 속엔 "나도 끼워주세요!" 하는 소심한 기대감도 함께 한다. 하지만 그 소심한 바람은 언제나처럼 소리 나지 않고, 들리지 않기에 너무 바쁘신 산타할배는 “이번 크리스마스엔 친구하나만 만들어 주세요.”하는 소원을 들어주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는 눈이 펑펑 내리면서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된 것이 행운인 듯, 드디어 잔 가득 와인을 부어 들고 쨍!~ 부딪히며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는 순간이 기적적으로 찾아왔다.

비록 멋지게 장식된 테이블에 예절바른 웨이터들이 차려주는 값비싼 만찬은 아니었지만,
"언니, 와인은 내가 쏠게!"하며 집에 있는 와인잔까지 들고 찾아온 우리의 영원한 지원자인 막내둥이 수경이가 쏴 준 생전 처음 맛보는 달콤하고 씁쓰름한 와인과,
케익은 언제나 "생크림케익이야!"를 외치는 언니를 위해 구운 하트케익 하나,
그리고 마요네즈에 싸구려 게맛살을 버무려 올린 초밥케익 한 접시와,
시들어가는 '파 꽁댕이'를 구제해 끓인 된장국냄비를 놓고 앉아 우리는 난생 처음 우리 손으로 만든 오롯이 우리만을 위한 야밤의 크리스마스파티를 열었다.

싱크대에 매달려 끙끙거리며 반죽해 구운 케익에는 생크림을 휘핑해 철퍽철퍽 발라도 보고 색색의 하트과자를 우수수 뿌려 나름으로는 데코도 하고, 단촛물을 섞은 밥 위에는 마요네즈로 버무린 게맛살을 올려 뭔가 부족한 듯 보이지만 그래도 나름으로는 근사해 보이는 초밥케익도 만들어서 상 한가운데 올리고, 냉장고구석에서 시들어가던 '파 꽁댕이'를 극적으로 구해내어 만든 심심한 된장국도 뜨끈하게 데워 상을 차리며 언니와 나의 마음은 둥실둥실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다.

이런 것들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했다면 아마 서툴고 더딘 손길과 식구들에게 그다지 보이고 싶지 않은 몸짓으로 방바닥을 쓸고 다녀야 하는 것을 포기하고 한옆에 앉아 상이 차려질 때까지 멀뚱멀뚱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 '가시방석의 자리를 꾹꾹 참아내야 했을 텐데' 하는 생각에 더욱 마음이 들떴는지도 모른다.

이렇듯이 언제나 가족들에 둘러싸여 지내느라 또래와의 '겪음'을 알지 못하는 나와, 언니의 한겨울 눈 내리는 심야외출이 만들어낸 난생 처음의 파티는 그 시간에 그 공간 안에서 함께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은 뭉게구름처럼 몽실몽실 피어올라 떠다니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가야겠다. 언니가 안자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서. 잘 놀당 가멘. 오늘 집 빌려주느라 고생핸.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일 년 뒤를 다시 한 번 기대해 보자고요."

눈이 하얗게 싸여가는 길을 서둘러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언니의 작별 인사 속엔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들뜬 흥분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응. 내년에도 심야의 외출을 시도하게. 언니 파이팅!"

아쉬운 인사를 하며 돌아가는 언니를 배웅하는 내 마음 역시 청개구리처럼 폴짝거린다. 된장국에 밥 한 그릇, 서툰 손짓으로 만든 케익 하나에 생전 처음 마시게 된 포도주가 전부였던 우리의 초라하지만 풍성했던 크리스마스파티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그날의 만남을 계기로 언니와 나는 '다시 또……'라는 내일을 꿈꾸게 되었다.

평범한 이들에게는 어찌 보면 우리의 이 들뜬 마음이 유난스러운 것일 지도 모른다. 외출의 자유, 두 발이 주는 자유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소소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발이 주는 자유가 쉽지 않은 우리에게 몇 년, 아니 평생을 별러 갖게 되었던 이 자유의 순간은 말로는 하기 어려운 감회를 갖게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해해주는 우리의 영원한 막둥이가 곁에서 부추겨준 덕분에 야밤의 외출을 감행할 수 있었던 언니와 나는 그 어떤 파티 못지않게 즐거웠던 시간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다음 언젠가는 나처럼 용기가 없어 심야의 외출 혹은 탈출(?)을 못해본 겁쟁이 친구들을 부추겨 신나는 우리들만의 파티를 열어보면 어떨까 하는 치기어린 용기도 생기게 된다.

"수경아! 고마워^^~ 언니, 내년에도 또 한 번? O・K?"

*이 글의 1차적 저작권은 강윤미 객원필진에게 있습니다.

강윤미씨 그는...

   
강윤미 객원필진.<헤드라인제주>
강윤미 님은 현재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힘겹게 강의실을 오가는, 하지만 항상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강윤미 님의 모습은 아랏벌을 훈훈하게 해 줍니다.

그 의 나이, 벌써 마흔을 훌쩍 넘었습니다. 늦깎이로 대학에 입문해 국문학에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분입니다. 휠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이 항상 직면해 있지만, 그는 365일 하루하루를 매우 의미있고 소중하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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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 2011-01-08 10:55:13 | 118.***.***.52
그야말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만한 성탄절 파티였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

따뜻한 글 2011-01-08 21:00:33 | 119.***.***.72
가슴 따뜻한 글이네요...진짜 겁쟁이들의 신나는 야밤 탈출이었겠네요..짧은 순간의 행복이 그대로 전해집니다.